새내기 사회인으로 출발한지 얼마 안 될 무렵, 나는 숨막히는 일상에서 탈출하기만을 갈망했다. 산이란 덫에 걸려 시간만 생기면 산을 떠돌았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찾듯 바위를 섭렵했다.
달력에 빨간 글씨가 표시된 날이면 어김없이 바위에 올랐다. 산꾼은 형식을 싫어하는 야성 강한 동물인 듯하다. 히말라야의 마칼루(8,463m)를 처음 오른 장 프랑코는 “등산은 스포츠이며 탈출이고 정열이며 일종의 종교다”고 했다. 문명사회에서 잃은 것을 자연에서 보충하고 재충전하는 것이 등산이 아닌가 싶다.
당시 자주 어울린 산꾼 중 신(申)브라운이라는 후배가 있었다. 일요일 아침 마누라 극성에 떠밀려 성당에 가던 그는 미사 도중 남들이 눈 감고 기도할 때 도시락 대신 바이블을 배낭에 넣고 산으로 도망쳤다. 세례명조차 영국의 걸출한 등반가 조 브라운(Joe Brown)의 이름을 딴, 그래서 산이 곧 종교이기를 갈망한 친구다. 동료 산꾼들은 세례명 앞에 그의 성을 붙여 신브라운이라 불렀고 그도 그것을 좋아했다.
신브라운이 내 권유로 가리봉동에서 우이동으로 이사한 뒤 우리는 의기투합, 도선사 상궁바위에서 볼더링(boulderingㆍ장비사용을 최소화하고 맨 몸으로 하는 바위타기)을 하고 출근했고 겨울에는 퇴근 후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계곡의 빙폭에서 해가 저물도록 빙벽등반 연습을 했다. 인공암장이 없던 시절이라 바위에서 하는 이 짓거리가 유일한 훈련이었다.
그는 달리기를 할 때 납으로 만든 무게 추를 발목에 차고 양 손에는 아령을 들었다. 아령을 들고 싸움 마당에 뛰어든 모습이 조직폭력배 같았다. 신브라운은 설악산 울산바위 북ㆍ동벽에 새로운 바위 길을 열었고 코오롱등산학교의 초기 강사로도 참여했다. 한국산서회 창립 초기에는 필자와 함께 등반사료를 발굴하기도 했다.
신브라운은 1982년 마칼루 원정에서 빛을 발하더니 87년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을 성취했다. 한국으로서는 7전8기 끝에 얻어낸 성공이었다. 그는 등반대장으로 참여해 허영호를 정상에 올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영문판 보고서 를 내고 세계 유명 알피니스트 27명의 행적을 묶어 <정상의 순례자> 를 간행했다. 정상의>
등산백과사전이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해박한 등산지식을 갖춘 문무 겸비의 학구적인 산꾼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브리지포트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강의하고 있으며, 뉴욕산악회 부회장으로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59m)와 히말라야의 아마다블람(6,856m)를 오르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신브라운은 클린클라이밍을 역설하며 직접 제작한 알루미늄 너트의 강도를 육탄시험하다가 다쳤고 배낭 대용으로 설탕포대를 슬링으로 묶어 다닌 기인이기도 했다. 바위를 할 때 식량을 챙겨오지 않고 대신 산신당에 차려진 제물을 노렸다.
이 무렵 나는 바위 맛에 한창 길들여져 있었다. 북한산 인수봉, 노적봉 외에 도봉산 주봉, 오봉으로 암벽등반을 하러 갈 때는 야영을 자주했다. 오봉은 한적한 산길과 갈대 숲이 좋았다. 한밤중에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면 태고의 정적이 있어 더욱 좋았다.
돌기둥을 꽂은 듯한 주봉과 발치 아래의 아늑한 야영장은 바위틈 맑은 샘물이 좋았고, 밤이면 숲 사이로 펼쳐지는 도심 야경이 아름다웠다. 신승모(재미). 전수철(재미). 이영식(재미) 등과 즐겨 찾은 주봉은 높이는 낮지만 보다 어려운 등반을 추구하기에는 제격이었다.
K크랙. 좁은 침니. 삼단벽. 오버행의 천장코스. 빌라길 등 인공등반과 자유등반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코스가 있었다. 당시 나의 꿈은 줄사다리를 쓰지 않고 천장코스를 오르는 것이었으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는 후배 이상기와 밤늦은 시간까지 등반을 하다가 로프를 회수하지 못한 채 맨 몸으로 내려오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작년 여름 이순의 신브라운이 잠시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걸려온 전화의 첫 마디는 “형님. 주봉은 아직도 제자리에 있지요?”였다. 그는 젊음을 불살랐던 주봉이 무척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에 묶여 그는 주봉에 가지 못한 채 출국했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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