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의 인턴 생활은 매년 7월 1일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열흘이나 늦은 7월 10일에야 병원에 도착했다.
미국 인턴생활 첫날은 변사체 부검을 돕는 일로 시작했다. 환경이 낯선데다 사체 부검도 처음이라 밤잠을 설쳤고, 다음날 수술실에서 졸다가 아주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우리 같으면 먼 곳에서 왔으니 하루쯤 쉬라고 할 만한데 원칙을 존중하는 미국인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게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훗날 깨달았다. 이런 생활태도는 나에게도 큰 교훈이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다. 동양인을 보면 거의 중국인으로 여겼고, 동양인은 대부분 세탁소나 식품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게도 중국인이냐는 질문을 많이 했는데 한국인이고 의사라고 하면 깜짝 놀라곤 했다.
1년 후 시카고의 안ㆍ이비인후과병원으로 옮겨 마음에 품었던 안과를 전공하면서부터 일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과 비교도 안될 만큼 첨단 장비와 시설로 환자를 진단, 치료하고 있었다. 생체현미경인 세격등(細隔燈) 현미경을 이용해 진단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확대경을 사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백내장 수술에 있어서도 우리는 수술 후 봉합을 하지 않고 2주 정도 아물기를 기다리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미국은 봉합용 바늘과 봉합사가 매우 발전해 두께 1㎜의 각막을 봉합, 환부가 속히 아물게 하는 치료법을 쓰고 있었다.
1년을 근무하고 나서 의료원장의 추천으로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대 안과대학원에 진학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강의를 듣고 실습을 하고 돌아와 복습까지 하면 몹시 피곤했다. 수업료, 숙식비 등 모든 경비를 병원이 보조해 주었지만 밤에는 백내장 수술환자의 특별 간호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특별 간호원은 환자 수발이 주 임무로, 특히 아침에는 반드시 환자의 얼굴과 등 그리고 다리를 씻어주어야 했다. 당시 레지던트의 월급이 120달러였는데, 특별 간호원은 하루 저녁 수당이 10달러였으니 제법 짭짤한 편이었다.
미국에서는 사람 손이 가는 것은 무엇이든 비쌌다. 이발료도 5, 6달러나 했다. 나는 대학 동창 윤기호와 주말에 서로 머리를 깎아주곤 했다. 서로 쳐다보며 잘 깎았느니, 못 깎았느니 하면서 웃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일리노이대학원을 마치고 시카고 안과병원에서 수학하다 3년 3개월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59년 9월 드디어 귀국 길에 올랐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미국을 횡단, 오리건주를 거쳐 북서부 워싱턴주의 시애틀로 가 그곳에서 한미재단이 알선한 해군 수송선을 타고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나는 11월부터 인천기독병원 안과과장으로 근무했다. 동창도 많고 미국에서 갓 귀국한 사람도 있어서 병원에서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61년 5ㆍ16이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역 군의관 소집령이 내렸다. 나는 한국전쟁 때 전주와 대전의 구호병원에서 근무한데다 54년 마산군의학교에 입교, 2개월간 기초훈련을 마치고 육군 중위로 예편한 상태였다. 5ㆍ16 주도 세력은 이렇게 예비역에 편입된 군의관들도 모두 소집했다.
서울 구로동의 예비중대로 소집된 나는 그 해 7월 부산 거제동에 위치한 제3육군병원 안과과장으로 배치됐다. 육군 안센터로 불리는 곳인데 대한민국 육군병원 중 가장 큰 안과병동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장비가 별로 많지 않았고, 눈 외상으로 안구적출 수술을 한 50~60명의 군인이 전역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인데 대위 계급장을 단 레지던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위인 내가 과장으로 부임하자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 유학, 안과학을 전공했고 이미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이라는 사실을 알려진 뒤 그런 일이 사라졌다. 그곳에서 1년 복무 후 62년 5월 전역했다. 이처럼 나는 두 번씩이나 군복무를 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그 군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221662’.
건양대 총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