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게 행동하면 명성을 얻지 못하고, 모호하게 일을 하면 공을 세우지 못한다.'
승부의 세계에서도 간혹 이 같은 애매모호한 경우와 맞닥뜨리게 되는 수가 있다. 내 경우 1977년 6월27일 염동균과의 대전이 그랬다. 염동균은 오래 전부터 내 절친한 친구였다.
당시 WBC는 주니어페더급이란 체급을 복원시킨 후 명칭을 슈퍼 밴텀급으로 개칭한 상태였고, WBA도 슈퍼밴텀급을 신설했다. 그러면서 WBA는 4명의 복서를 랭킹에 올려 4강전을 계획했는데 나와 염동균 둘 중 승리한 사람이 일본의 다나카 후타로와 대결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시합에서 이긴 사람이 헥토로 카라스키야와 헤수스파라고사 전의 승자와 대망의 초대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염동균은 동신체육관에서 같이 운동하기도 했고, 매니저도 같았으며 괌 원정 경기도 같이 치렀고 군 생활도 같이한 오랜 라이벌이자 친구였다. 친구를 상대로 중요한 일전을 치러야 하는 얄궂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이에 앞서 벌어진 염동균과 고메스의 아쉬운 판정은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1976년 로얄 고바야시를 15라운드 판정으로 누르고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에 오른 염동균은 호세 카펜터스와 1차 방어전도 치렀으나 그 이듬해 윌프레도 고메스에게 져 타이틀을 잃었다. 그때 사실 염동균은 고메스를 1라운드에 KO로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메스의 공격을 받던 염동균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레프트훅을 날렸고 이를 맞은 고메스가 다운 당했는데 당시의 주심이 무려 22초 동안 카운터를 세는 바람에 고메스가 일어나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시합은 체력이 달렸던 염동균이 12라운드 KO로 역전 당하고 말았지만 염동균의 패배가 아닌 우리 스포츠 외교의 패배라 할 수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다시 염동균과의 라이벌전으로 기억을 되돌려 보자. 그는 야심만만한 친구였고, 가슴에 독한 오기를 품고 있었다. 고메스에게 챔피언 벨트를 빼앗긴 후였으므로 그도 친구인 나를 딛고 서지 않으면 선수생명의 위기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둘다 서로를 이겨야 하는 외나무다리 승부였던 것.
염동균은 배수의 진을 치고 나왔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내 단점을 모두 꿰고 있는 김준호 선생님을 세컨드에 임명했으며 장외 신경전까지 펼쳤다. 드디어 운명의 대결이 벌어졌다.
그러나 타이틀전을 불과 한 달 전에 치른 염동균은 미처 피로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다소 지쳐 있었고 나는 자신이 있었다. 결국 10회 판정승을 거두고 4강행 티켓을 거머쥐게 되었다.
염동균은 결코 종이호랑이가 아니었다. 그를 잘 안다고 해서 만만히 생각하거나, 친구라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링 바닥에 굴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먹이나 작전에 우정이 개입됐다면 결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재기는커녕 자의반 타의반 은퇴의 길로 접어들어야 했을 것이다.
염동균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선수다. 복서로 타고난 끼와 자질 등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유능한 선수였지만 한창 때 손을 다치면서 꽃을 다 피우지 못한 느낌이다.
특히 그의 양훅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와 1980년 12월19일 장충체육관에서 마지막 라이벌전(무승부)을 치렀고 그 일전이 내 링인생에서의 '마지막 승부'이자 은퇴무대이기도 했다.
염동균을 꺾고 진출한 4강전은 카라스키야를 만나기 위해 꼭 이겨야 하는 일전이었고 상대는 일본의 다나카 후로타였다. 1977년 10월10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후로타전에서 나는 12회 심판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뒀다.
이 경기 승리를 포함, 일본 선수와의 13번 시합에서 12번을 이기며 '일본 복서 킬러'라는 별명도 붙었다. 데뷔 이듬해인 1970년 5월 일본선수 상대 1호인 우시와 카마루 하루다에 10라운드 패배이후 대일전 12연승 행진을 했던 것이다.
후로타를 꺾은 나는 마침내 베네수엘라의 헤수스 파라고사를 3회 KO로 꺾은 카라스키야와 11월26일 최종 챔피언결정전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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