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도밍고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1974년 7월 돌연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그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페론의 첫 번째 부인 에바(1919~1952), 애칭 '에비타'의 유해를 대통령궁으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후안이 아니라 에바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취약한 대중적 지지를 메울 수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러나 에바와 닮은 출신 및 용모를 이용하려던 시도는 실패했고, 결국 21개월 만에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 이 나라 국민들의 마음에서 이사벨은 죽었으나 에바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레콜레타 묘지에 있는 묘소에는 지금도 헌화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시골뜨기 처녀가 퍼스트 레이디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는 1978년 초연된 뮤지컬 <에비타> 와 주제가 'Don't cry for me, Argentina'로 세계인의 가슴을 적셨다. 빈민과 여성 등 소외된 계층을 사랑했으되, 남편을 도와 파시즘적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론주의'를 완성한 그녀는 '거룩한 악녀'였고 '천한 성녀'였다. 33세로 요절했기에 추억은 더욱 애절하다. 에비타>
▦ 두 여성에 대한 기억을 함께 되살리게 하는 '마담 프레지던트'가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탄생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주인공이다.
세계 언론은 '아르헨티나 최초의 여성 직선 대통령'이니, '초유의 부부 대통령'이니,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가 '제 2의 에비타'와 '제 2의 이사벨'의 갈림길에 섰다고 분석한다.
인플레이션 등 남편이 넘겨준 고도성장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파이낸셜 타임스 등은 "차기 에비타를 맞은 아르헨티나가 울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벌써부터 재를 뿌린다.
▦ 페르난데스의 등장은 여성 국가지도자에 대한 관심도 새삼 일깨웠다. 남미엔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과 자메이카의 포샤 심프슨밀러 총리가 있고, 유럽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아일랜드의 메리 매컬리스 대통령 등이, 아시아엔 필리핀의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과 인도의 프라티바 파틸 대통령이, 아프리카엔 라이베리아의 앨런 존슨설리프 대통령과 모잠비크의 루이자 디오구 총리가, 오세아니아엔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 총리가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마담 프레지던트'가 6대주를 누비게 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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