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다 가슴 아프지만 버스정류장이나 기차역에서의 그것은 낫다. 버스나 기차가 모퉁이를 돌면 잊을 수 있다. 공항의 이별은 더 낫다.
대합실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부터 견딜 수 있다. 항구의 이별은 가장 오래 가장 진하게 가슴이 아리다. 배가 수평선 너머 사라질 때까지 갑판 위의 흔들리는 손수건을 지켜봐야 한다.
거꾸로 만남의 기쁨과 기대를 가장 많이 상승시켜주는 것도 그렇다. 뱃전에 나와 있으면 산 마을 항구가 차례로 클로즈업 되고, 점과 같은 얼굴이 점점 커져 다가온다. 이별을 마무리해주고, 만남을 예시해 주는 것이 등대다.
■ 15세기말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는 각각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쪽으로 진출했고, 1529년 지금의 말레이시아 근방에서 만났다. 1521년 마젤란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증한 후였다.
인도양을 건너온 포르투갈과 태평양을 넘어온 에스파니아는 몰루카제도 동쪽 17도 바다 위를 경계로 서쪽과 동쪽으로 지구를 반씩 차지하기로 합의했다(사라고사 조약).
함선들이 서쪽과 동쪽만 바라보고 항해를 하다 육지를 발견하는 데는 미지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불빛이 결정적 도움이 됐다. 그들은 훗날을 위해 그 불빛을 '더 높이 더 크게' 하여 등대를 세웠다.
■ 세계 7대 불가사의는 각양각색이지만 현존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언급되는 것이 '파로스 등대'다. BC 3세기 지중해 동쪽 알렉산드리아 항구 앞 파로스 섬에 세워진 것인데 하얀 대리석으로 135m 높이였다.
꼭대기에 설치된 이동식 반사경은 밤에는 횃불 빛을 43㎞까지 보낼 수 있었고, 낮에는 태양열을 모아 수십㎞ 떨어진 바다 위의 적선을 태워버릴 수 있었다 한다.
12세기 전후 두 차례의 지진으로 무너졌다며 전설 취급을 받았으나, 1994년 프랑스 고고학팀이 7~8m 해저에서 수백 점의 잔해를 발견한 후 이집트가 그 원형을 복원 중에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1903년 인천 앞 바다 팔미도에 세워졌다. 웬만한 항구나 포구에 예부터 등대가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현대식 등대로는 처음이라는 의미다.
당시 일본이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 조선 조정에 압력을 넣어 만든 것인데, 1950년 9월 14일 자정에 점화된 이 곳 등대불은 인천상륙작전의 출발신호가 됐다.
해발 71m의 산 위에 8m 높이로 서 있는데, 2003년 그 옆에 30m 높이의 최신형을 추가해 지금은 '형제 등대'가 됐다. 그 동안 군사적 이유로 폐쇄돼 있었으나 내년 하반기에 일반에 공개될 모양이다. 등대의 애환이 벌써 그립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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