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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사랑의 행진' 혁명 후 멕시코, 혼돈과 상처의 점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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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사랑의 행진' 혁명 후 멕시코, 혼돈과 상처의 점묘화

입력
2007.10.27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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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히오 피톨 지음ㆍ전기순 옮김 / 박영률출판사 발행ㆍ352쪽ㆍ1만2,500원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는 ‘이념의 팔레트’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스페인 공화주의자, 프랑스 초현실주의자, 독일 사회주의자, 트로츠키와 그의 가족, 루마니아 카롤 왕 등 다양한 성향의 망명자들이 이 도시에 살았다.

1942년 8월 멕시코는 독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의 아수라장에 발을 담갔다. 나치즘을 추종하는 극우파와 이들을 적대시하는 극좌파가 충돌하면서 멕시코시티를 가득 채운 색색의 이념들은 다시금 출렁였다.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세르반테스상의 2005년 수상자 세르히오 피톨(74)의 장편 <사랑의 행진> 은 2차대전과 멕시코의 관계를 추리소설 형식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멕시코가 추축국에 선전포고한 직후, 멕시코시티의 유명 화상(畵商) 델피나는 자신이 살던 당시 최고급 건물 ‘미네르바’에서 파티를 연다.

각계 명사들이 모여든 이 파티에서 살인 사건이 돌발한다. 미네르바에서 살던 아홉 살 소년 델 솔라르에겐 숙부의 의붓아들 되는 사람이 죽은 것이고, 숙부 또한 얼마 뒤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러 역사학자가 된 델 솔라르는 세간에 묻힌 1942년 살인 사건의 진실을 알고자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독일 태생 미국 영화감독 에른스트 루비치의 1929년작 <사랑의 행진(the love parade)> 의 제목을 딴 이 소설은 영화 <라쇼몽> <시민 케인> 등이 그랬듯, 여러 증인들의 ‘개인적 진실’을 취합해서 총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2차대전이나 멕시코 근현대사 수준의 거대 서사 대신, 구술자가 발언하는 ‘사소한 것’들로 역사를 섬세히 점묘하겠다는 작가의 문학적 의지이기도 하다.

델 솔라르가 찾아가는 인물들은 1914년 혁명 이후 멕시코 사회에 도래한 혼돈의 상황을 상징한다. 에두비헤스 숙모는 혁명으로 몰락한 전통 가문을, 델피나는 비천한 출신을 딛고 신분 상승을 이룬 신(新)부유층을 표상한다.

독일 정치 세력과 연계해 정부 전복을 기도하다가 아들과 함께 비명횡사한 아르눌포 숙부는 멕시코의 폭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한 단면을 대변한다. 음울한 고문서 수집상 발모란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거세된 남자의 불행한 최후를 증언하며 멕시코 역사에서 아직 아물지 않은 외세 통치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이한 처지, 불완전한 기억에 기반한 증언들이 결국엔 살인 사건의 진실, 나아가 그 배후에 드리워진 멕시코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밝혀주리라는 믿음은 독자가 촉각을 세우고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동력이 돼준다.

설령 그 믿음이 배신 당할지라도 너무 노여워 마시길. 저마다 개성적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풀어내는 생동하는 이야기들은 그것의 플롯이나 알레고리를 굳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우니 말이다.

단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을 읽을 때처럼 수다한 등장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리면서 읽는 것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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