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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3> 장인 김수길씨 국산 등산장비 개발 '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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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3> 장인 김수길씨 국산 등산장비 개발 '큰획'

입력
2007.10.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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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아웃도어 시장의 규모가 작았던 1970년대는 국산장비 또한 매우 열악했다.

어렵고 궁핍한 시절, 산에 다니는 사람을 호사를 즐기는 백수쯤으로 여기던 그때, 아웃도어 스포츠라는 개념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수요가 적은 등산장비를 제조해 연명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당시는 군용청자(청색의 자일), U.S비너(카라비너의 줄임말), A형 텐트, 버너, 침낭 등 등산장비가 미군 야전용 일색이었다. 등산복도 군복을 염색, 개조한 것으로 지금처럼 세련된 디자인과 색상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군용장구로 무장한 산악인들은 헌병 검문소가 있는 지역의 산으로 갈 때 군수품의 압수를 피하기 위해 몇 ㎞를 우회해야 했다. 보급투쟁을 끝내고 산으로 들어가는 빨치산 행렬과 흡사했다고나 할까.

특히 암벽등반에 필요한 카라비너가 흔치 않던 시절이어서 ‘U.S비너’로 부른 군용 카라비너를 신주 모시듯 했다. 카라비너는 사람을 산과 결속하는 고리인데 마음의 연결, 동류의식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단순한 등산용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산악인이 딸 이름을 카라비너의 약칭인 비나(毘娜)라고 지어 호적에 등재했을 정도다.

그때는 지금처럼 정식 통관절차를 거친 수입품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해외 여행자의 손에 들려 남대문시장 장비점에 외제 카라비너가 한 두개라도 들어오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현금을 들고 선착순으로 뛰어가야 했다. 등산용품도 사치품으로 인정해 높은 관세를 물렸던 시기다.

마침 성능이 검증되지 않은 최초의 국산 카라비너가 등장했으나 한 산꾼이 북한산 인수봉을 오르다 추락할 때 그 카라비너의 여닫이 스프링이 절단돼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장비가 귀하고 국산장비의 질이 떨어지던 시기에 MK(모래내 금강제작소의 영문 약칭)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장비 개발에 새 장을 연 장인 김수길씨가 있었다. 그가 두들겨 만든 장비들은 장력과 강도 테스트를 위해 직접 육탄실험을 한 결과물이었다. 그 중 빙벽에 확보용으로 박는 발트 혹(Wart Hog)은 한국 산악계의 과제였던 설악산 토왕성빙폭의 초등(1977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가 만든 MK 피켈은 1973년 한국산악회 알프스 훈련대의 몽블랑 등반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80년 마나슬루(8,156m) 원정 때도 사용됐다. 군 특수부대에 납품돼 자주국방의 일익을 담당하는가 하면 일본 원정대가 히말라야 등반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망치로 두들겨 만든 장비들은 그 품질이 외국산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산악인들은 비싼 외제품을 구하는데 혈안이 돼있었다.

김수길씨는 제품 실험 도중 암벽에서 추락해 수 차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가 행한 죽기 살기식의 실험은 국내 산악인들의 냉랭한 시선을 향한 몸부림이었고 산악인의 안전을 위한 처절한 자기 확인이었다. 그에게 실험 중 얻은 부상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신 어떤 방법으로 훌륭한 장비를 만들 수 있을까, 그는 오직 그것만 생각했다. 그는 그런 실험을 통과, 안전성이 입증된 장비만 판매했다.

당시 김수길씨는 카라비너, 피켈 외에도 피톤, 해머, 봉봉, 아이젠 등을 만들었다. 그가 30자루 한정으로 만든 ‘토왕성 피켈’은 명품 중 명품으로 수집가들 사이에서 비싼 값으로 거래되고 있다. 나는 그의 열정과 혼이 깃든 초기 제품 ‘가도다(門田)’ 형의 피켈을 소장하고 있다.

그가 만든 카라비너가 1972년 세계 최고의 등산장비 제작소인 미국의 대태평양공작소(Great Pacific Iron Work)의 실험대에 오른 적이 있다. 인수봉에 취나드 A. B라는 멋진 바윗길을 개척한 세계적인 등산가 이본 취나드가 설립한 회사다. 인장력 실험에서 그 MK카라비너가 2,041㎏의 하중을 견디는 놀라운 결과를 내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등산 장비가 산악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하려면 산업기술이 뒷받침돼야 하며 숙련된 장인이 있어야 하는데 김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김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쯤이다. 미국에서 들여온 외제 피켈의 자루 길이를 줄이려고 그의 대장간을 찾았는데 그때 그가 한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값싸고 질 좋은 국산 장비는 외면하면서 왜 굳이 외제 장비를 선호하십니까. 국내 수요가 늘어야 국산장비의 질이 개선되는 것입니다.”

김수길씨를 만난 뒤 내가 속한 산악회는 그가 만든 피켈과 아이젠을 구입해 사용했다.

질 좋은 장비의 제작을 위해 온몸을 던져 헌신한 이 순박한 장인은, 자금력 있는 동업자와 함께 국내 시장을 개척하려다 그에게 속아 공장 문을 닫고 실의에 빠져 중병을 얻어 타계한다. 몸을 던져 장비 분야를 개척한 장인 1세대 김씨가 있었기에 과학적인 방법으로 장비의 대량생산과 상품화를 이룬 2세대 홍성암씨가 등장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だ?생을 살다 갔지만 이들은 한국등산장비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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