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리 줄레조 등 지음ㆍ양지윤 옮김 / 후마니타스 발행ㆍ320쪽ㆍ1만7,000원
한국과 일본,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권력들은 공통적으로 고급 호텔을 지었다. 서구적인 것을 ‘거주’하게 만들기 위해 맨 처음 필요한 것이 숙박시설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조차지 권력은 1863년 톈진에 리쉰더 호텔을, 일본 메이지정권은 1889년 도쿄에 데이코쿠(帝國) 호텔을, 조선총독부는 서울에 1914년 조선호텔을 지었다.
프랑스의 지리학자와 건축사학자 7명이 함께 2003년에 쓴 이 책은 아시아의 고급 호텔들을 ‘현대성과 서구화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기호들의 집합체’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시선에서 동아시아에서의 고급 호텔의 등장과 그 사회적 기능을 고찰하고 있다.
한국에서 고급 호텔의 역사는 그 자체가 산업화 과정의 축약도다. 한국 최초의 호텔은 1888년 일본 사업가 호리 리키타로가 지은 인천 대불호텔이었다. 철도가 개설된 이후에는 1912년 부산철도호텔을 기점으로 많은 철도호텔이 생겨났다. 한국판 호화 숙박업소 모델의 정립을 알린 것은 조선호텔의 건설이었다.
로코코 양식의 식당과 루이16세 양식의 무도장 등을 갖춘 이 호텔은 식민사회 엘리트들의 단골 명소가 됐고, 1938년 지어진 반도호텔과 함께 1960년대 초반까지 서울의 정치, 경제, 사회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일제시대 일본을 매개로 두 호텔에 적용됐던 유럽 양식은 1963년 워커힐호텔 건설을 기점으로 미국식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조선호텔 역시 재건축되면서 최첨단의 미국식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호텔산업은 정경유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워커힐호텔은 선경그룹에, 영빈관은 삼성 계열사로 넘어가 신라호텔의 모태가 됐다. 롯데호텔 역시 롯데의 국내 투자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필요에 따라 지어졌다.
서구 호텔과 구별되는 아시아 고급 호텔의 특징은 다양하고 규모가 큰 서비스 시설이다. 서울의 고급 호텔의 경우 예외없이 각국의 음식을 파는 식당, 쇼핑 상가, 바, 레저 시설 등을 구비하고 있다. 숙박에서는 외국인 여행객의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전체 매출액에서는 상류층 고급 사교문화를 향유하려는 현지 중산층의 소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그 고급 호텔들은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서구와 접촉할 수 있는 장소이자 하나의 소우주이며, 사회적 지위를 연출해 무대에 올릴 특권적 공연을 한국 중산층에게 제공하는 장소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