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발행ㆍ 416쪽ㆍ 1만4,000원
어린시절 눈 내린 아침이면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찍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때로는 누군가 이미 남겨놓은 발자국을 그대로 다시 밟아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어정쩡하니 몸의 중심을 잡는 게 큰 일이었다. 사람 마다 보폭과 걸음걸이가 다르니 먼저 간 이의 흔적을 그대로 다시 밟는다는 것이 수월할 리 없다.
역사를 보는 눈도 마찬가지지 싶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史實)을 좇는 데도 사람마다 눈높이가 다르니 글 쓴 이에 따라 역사의 새로운 속살을 접하게 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이 쓴 <발자국> 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꼭 366일(윤년 기준) 분량으로 역사 속의 오늘을 의미있게 만든 주요 인물과 사건들을 답사한다. 발자국>
답사의 대상은 작가(가르시아 로르카 등)에서 철학자(한나 아렌트 등), 종교인(성철 스님 등), 음악가(빌리 홀리데이 등), 정치가(마오쩌둥 등), 학자(노엄 촘스키 등), 출판인(가스통 갈리마르 등), 사업가(질레트 등), 탐험가(모리스 에르조그 등), 운동선수(무하마드 알리 등)에 걸쳐 있고, 사노맹 민정당 중화인민공화국 같은 집합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그들이 살아낸 역사적 사건들, 수많은 전쟁, 독재와 차별과 항쟁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책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역사 속의 오늘’이라는 객관적인 일지 형식에 담긴, 저자의 대담하고 주관적인 역사해석을 접할 때다.
예를 들어 10월 26일자 ‘박정희의 추억’에서 저자는 박정희 암살 소식을 듣고 느꼈던 새 시대에 대한 들뜸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적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권력욕에 치여 무고하게 죽고 다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 말이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어 놓고 저 혼자 욕망의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의 전설적인 여성 스파이 마타하리에 대한 글의 경우, 와전된 신화에 대한 짧지만 명쾌한 해부로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저자는 마타하리가 요염한 나체춤으로 유럽 사교계를 홀린 것은 사실이지만 나이 들면서 인기는 시들해졌고, 돈 욕심에 수락했으나 서툴기 짝이 없던 이중간첩 활동은 어설프게 끝나고 말았다고 전한다.
이 글들은 한국일보에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2000~2005년 사이 매일연재한 칼럼에서 추린 것들이다. 저자는 책 말미 ‘군소리’에서 “역사적 역할의 크기에서 엄청난 차이가 없다면 되도록 남성보다는 여성, 백인보다는 유색인, 다스리는 자들보다는 저항하는 자들에게 눈길을 주고자 했다”고 글 쓴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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