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의 집 관리인은 일흔이 다돼 보이는 노인이었다. 주뼛주뼛하는 아내와 나에게 그는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 왔다.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의 거처 겸 작업실이었다는 이 곳에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그만큼 자주 닿았다는 뜻일 테다.
그러나 그가 아는 한국어는 그게 다인 듯했다. 관리인은 이내 제 모국어로 돌아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밀레의 집은 소박했다. 조붓한 공간을 셋으로 나누어 밀레의 유품들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하기야 “육체노동을 찬양하며 농부들을 새로운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만든”(예술사학자 아르놀드 하우저의 평가) 화가의 생전 공간이 소박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게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밀레는 박제된 밀레지만, 이 곳 바르비종 밀레의 집에 어른거리는 밀레는 생짜 밀레, 생활인 밀레다. <이삭 줍는 여자들> 의 공간이 바로 이 둘레다. 이삭>
1960년대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저녁종> 이라는 단원이 있었다. 밀레의 짧은 전기 텍스트였다. 나는 아마 그 글을 읽으며 밀레라는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됐을 것이다. 저녁종>
그런데 이 외국 이름이 처음부터 그리 이국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 화가가 제 화폭에 주로 농민들을 담았다는 사실과, 그 화가 이름의 첫 음절이 ‘밀’(내 귓속에서 이 말은 즉시 ‘소맥’과 포개졌다)이라는 사실이 내 상상력 속에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밀레와 함께 그 즈음 뇌리에 새겨진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이름을 내가 썩 이국적으로 받아들였던 것과 기이하게 대조적이다.
■ 문턱마을 바르비종서 밀레·루소 등 활동
그 초등학교 때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뒤 프랑스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나는 그들이 이 화가의 이름을 ‘밀레’가 아니라 ‘미예’로 발음한다는 걸 알게 됐다. 장-프랑수아 미예! 프랑스인들에게만 장-프랑수아 미예가 아니었다. 토종 한국인인 내 아내도, 금방 밀레의(미예의!) 동포들을 따라, 제 입에 수십 년 동안 익었던 ‘밀레’를 버리고 ‘미예’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미예’라는 이름에서 내가 알고 있는 밀레를, <만종> 의 작가 밀레를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뒤에도 줄곧 밀레를 고집해오던 터였다. 만종>
그런데, 밀레의 집 관리인이 우리의 화가를 ‘밀레’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단박 호기심이 동해 그에게 물었다. “밀레가 맞아요 아니면 미예가 맞아요?” “둘 다 맞아요. 미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긴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대개 미예라고 불러요. 그렇지만 밀레 집안 사람들은 스스로 밀레라고 부릅니다.” 밀레를 고집하길 잘했군. 그러나 아내는 그 노신사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도 미예를 버리지 않았다. 속을 모르겠다.
바르비종은 퐁텐블로시(市) 들머리의 마을이다. 풍광은 프랑스 여느 농촌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19세기 중반 이 마을로 찾아들어 작업 공간을 꾸린 화가들 덕분에 제 이름을 미술사에 굵은 글씨로 들이밀게 되었다.
바르비종파 또는 퐁텐블로파라 불리는 이 예술 동아리에는 밀레 외에 테오도르 루소,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샤를-프랑수아 도비니, 콩스탕 트루아용, 쥘 뒤프레 같은 이들이 끼여있다.
이들은 바르비종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도회지의 풍진을 피해, 또는 친구를 따라 이 시골마을로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루소와 밀레는 이 마을에서 죽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인상파 화가들도 더러 바르비종을 찾았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밀레의 집말고도 바르비종파와 인상파 화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 여럿 있다. 바르비종 화가들이 드나들던 간(Ganne) 여관은 지금 박물관이 돼 있다.
바르비종은 퐁텐블로의 문턱일 뿐이다. 아내와 내 나들이 목적지는 퐁텐블로였다. 퐁텐블로를 도시라 말하는 것이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거기엔 여느 도시에서와 같은 복닥거림이 없다.
이 도시는, 곧이곧대로 얘기하자면, 숲속의 빈터다. 그 숲은 퐁텐블로 숲이고, 그 빈터 한 가운데엔 웅장하고 아름다운 퐁텐플로성(城)과 정원이 들어서 있다.
■ 佛 최대의 왕성 퐁텐블로성 우아한 위용
퐁텐블로성은 프랑스 최대의 왕성(王城) 가운데 하나다. 이 곳에 성이 처음 들어선 것은 12세기 이전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의 얼개가 만들어진 것은 1530년대 프랑수아1세 때다. 프랑수아1세는 퐁텐블로성을 환골탈태 수준으로 증축하며 이탈리아 매너리즘 예술가들을 초청해 내부 장식을 맡겼다.
로소 피오렌티노,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 같은 이들 매너리스트들을 미술사에선 퐁텐블로파라 부른다. 이들을 19세기 바르비종파의 이명(異名)인 퐁텐블로파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퐁텐블로성 내부를 꾸민 이들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통해서 매너리遲?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소개된 탓에, 16세기 프랑스 매너리즘을 흔히 ‘퐁텐블로 스타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매너리즘[이탈리아어로는 ‘마니에리스모’]은 고전주의 르네상스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건너가는 과도기에 유럽 조형예술계를 풍미한 미술양식과 이념을 가리킨다. 더러 ‘양식주의’라 번역되기도 한다.
이런 뜻의 매너리즘에는 흔히 ‘매너리즘에 빠졌다’라고 말할 때의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져 있지 않다. 조형예술 용어 ‘매너’[이탈리아어로 ‘마니에라’]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개인적 지평 위에 세워진 표현방식, 곧 넓은 의미의 스타일을 덤덤하게, 때로는 적극적 값어치를 담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전주의자들은 이런 의미의 매너와 매너리즘에도 진부성 가식성 따위의 부정적 뉘앙스를 씌웠다. 하우저에 따르면, 매너리즘은 고전주의의 너무 단순한 규칙성과 조화를 해체하려는 노력이었다. 매너리스트들은 고전주의 예술의 초인격적 규범성을 좀더 주관적이고 암시적인 특징들로 대치하려 했다.
매너리즘은, 역시 하우저에 따르면, 종교 체험을 심화하고 내면화하면서 삶을 움켜쥐는 정신세계의 새로운 비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현실을 의식적 의도적으로 변형하며 괴상함과 난해함에 탐닉하는 주지주의였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참조) 문학과>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50여 km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그 이후의 왕들이 워낙 공을 들여 가꾸고 다듬은 탓에, 퐁텐블로성은 베르사유궁에 버금가는 프랑스 왕족들의 거처가 되었다. 세워진 시기로 보면 외려 퐁텐블로성이 으뜸이고 베르사유궁을 버금이라 해야 할 게다.
프랑스 군주들이 여럿 이 성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국빈으로 초대된 외국 군주들도 여럿 이 성에 머물렀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과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도 이 곳에 머문 외국 군주들이었다. 교황 비오7세는 나폴레옹의 세속주의 정책에 맞서다 황제의 포로가 돼 이 성에 연금되기도 했다.
■ 루이14세·나폴레옹… 역사적 사건의 현장
퐁텐블로성의 역사를 훑어보는 것은 그대로 프랑스 정치사의 고갱이를 더듬어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둘만 살피자. 1685년 태양왕 루이14세는 이 성에서 퐁텐블로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의 내용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부분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던 앙리4세의 낭트칙령(1598)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퐁텐블로 칙령에 따라 프랑스 전국의 위그노 교회들이 파괴되고 위그노 학교들이 폐쇄됐다. 국왕의 위세를 업고 날뛰던 용기병(龍騎兵)들은 위그노들을 박해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강요했다.
퐁텐블로 칙령은 프랑스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루이14세의 최대 실책이었다. 이 칙령이 내려진 뒤 2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위그노가 개종을 거부하고 프랑스 바깥으로 달아났다.
그것은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이뤄진 두뇌 유출이기도 했다. 위그노들 가운데는 섬유, 도예, 금속세공 분야의 숙련기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비밀 결혼한 아내 맹트농 부인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에 아첨하기 위해서였는진 모르겠으나, 루이14세는 어리석게도 당대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재능들을 나라 바깥으로 내쫓았다.
다음 장면은 1814년이다. 폐위된 프랑스제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퐁텐블로성 정문 안쪽 ‘백마의 광장’에서 자신의 근위병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 뒤 이 광장은 ‘이별의 광장’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마무리해 놓은 사람이다.
그는 베르사유궁이 내뿜는 부르봉왕가의 이미지에 맞서 자신만의 위대함을 퐁텐블로성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성의 일부분은 나폴레옹이 이 곳에 살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다.
나폴레옹이 사용했다는 나무목욕통까지 있다. “황제의 목욕통치곤 너무 초라하군.” 아내가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그것은 내가 들어가 몸을 누이기에도 너무 작아 보였다. 나폴레옹 덩치가 작긴 작았나 보다.
아내와 나는 성을 나와 숲을 오래 걸었다. 군데군데 아람벌어진 밤들이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파리에 가져가 구워먹을 생각으로 주머니에 그 밤들을 주워담았다. 10월의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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