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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경선 승리까지 험난했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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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경선 승리까지 험난했던 여정

입력
2007.10.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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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과 지옥을 여러 차례 오가다 결국 준비됐던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당선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거듭했다. 참여정부 초반 '정권의 황태자'로 각광받으며 유력 대선주자로 인정받았던 그는 우리당 지지도가 하락하면서 덩달아 추락하는 절망도 맛보아야 했다. 결국 올해 초부터 신당 창당 주도로 승부를 걸어 마침내 17대 대선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5년 12월 통일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정 전 의장은 2006년 2월 두 번째 당의장에 당선되면서 우리당에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이 이끌었던 5ㆍ31 지방선거 참패로 큰 타격을 입었고 독일로 떠나 잠시 휴지기를 가져야 했다.

2월 김한길 의원 등 친(親)정동영계가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 한다"며 탈당하면서 재기의 계기가 마련됐다. 물론 친노(親盧)와 반노(反盧) 진영의 대립이 거세졌고 정 전 의장은 탈당 배후로 낙인 찍혀 친노 그룹의 '배신자'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정 전 의장은 6월 우리당을 탈당했다. 앞 길은 막막했다. 하지만 꾸준히 평화민주개혁 세력 대통합론을 설파했고 다양한 그룹을 만나며 신당 창당을 주도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훈수정치로 민주당 내 대통합파가 가세했고, 중도신당을 만들었던 김한길 의원 등이 돌아왔다. 여기에 정세균 전 우리당 의장의 노력 덕분에 친노 진영 전체가 합류하면서 8월 대통합민주신당이 만들어졌다.

정 전 의장은 2~3% 대 바닥 지지율로 헤맸지만 특유의 감성정치를 바탕으로 조직을 다지고 있었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까지 경선 판에 끌어들이면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첫 승부처는 룰 미팅. 정 전 의장 측은 조직의 힘이 최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반 선거인단 무한 모집 방식의 국민경선을 끌어냈고, 상대적으로 손 전 지사가 우위에 서 있던 여론조사 반영률은 10%로 낮췄다.

반전은 9월 5일 예비경선부터 시작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질주하던 손 전 지사에 0.3% 포인트 뒤진 근소한 2위를 차지함으로써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한 것.

여세를 몰아 9월 15일 제주 울산 첫 경선에서 1위를 거머쥐고 16일 충북 지역 압승으로 판도를 뒤흔들었다. 이어 추석 직후 실시된 광주 전남 부산 경남 수퍼 4연전에서 또 1위를 차지하면서 신(新)대세론을 형성했다.

그러나 손학규 이해찬 진영은 불법 동원선거를 제기했고 경선 참여를 거부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노 대통령 선거인단 명의 도용에 따른 경찰의 정 전 의장 캠프 압수수색 시도(10월 5일)는 위기의 절정판이었다. 정 전 의장은 잘못에 대한 사과로 국면 전환을 꾀했고 14일 '원샷 경선' 수용으로 파국을 방지했다.

그는 2차례의 모바일 투표에서 손 전 지사에게 1위 자리를 내주면서 막판까지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경선 마지막 날 텃밭인 전북 지역 경선 압승과 수도권 선전을 바탕으로 손 전 지사의 추격을 뿌리치고 최종 승자가 됐다.

정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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