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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휴전일 태어난 열혈기자, 남북화합·정권 재창출 기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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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휴전일 태어난 열혈기자, 남북화합·정권 재창출 기수로

입력
2007.10.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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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MBC 앵커 출신의 정치인이다. 정 후보는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전주 덕진구에서 출마,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어 새천년민주당 대변인과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1963년 36세의 나이로 공화당 의장에 선출된 이래 최연소 여당 대표(열린우리당 의장)에 올랐다.

이 때문에 그의 키워드는 항상 '세대 교체'였다. 2006년에는 우리당의 지방선거 참패로 절대절명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오뚝이처럼 화려하게 재기했다.

휴전협정일에 태어나다

정 후보는 53년 7월 27일 전북 순창군 부림면 율북리에서 전북도의원을 지낸 고 정진철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날은 휴전협정 체결일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 6ㆍ25전쟁 중 네 명의 형이 젖먹이 때 병사하자 그는 장남이자 13대 종손이 됐다. 고향 마을의 율북초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전주로 유학을 나간 뒤 전주북중과 전주고를 졸업했다.

불행한 가정사는 이어져 고2 때 와병 중이던 아버지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가난한 집안을 보살펴야 했다.

10월 유신이 선포된 72년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72학번 동기생의 징역형을 다 합하면 100년이 넘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투옥과 수배가 반복되던 시절이었다.

정 후보는 최초의 유신반대 학생시위로 기록된 73년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데모에 참가했으며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구치소에 구금됐다. 다음 해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3개월 간 복역한 후 군에 강제 징집됐다.

구치소를 드나드는 아들 걱정에 정 후보의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봉제공장을 시작했다.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 뒤편 언덕배기의 작은 집 방 한 칸에 재봉틀 몇 대를 들여놓고 아동복 바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에 내다팔았다.

정 후보는 오버로크를 친 천을 둘러메고 청계천을 오갔고, 군에서 제대한 뒤 졸업할 무렵에는 평화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옷 장사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기자에서 스타 정치인으로

졸업과 동시 MBC 보도국에 입사한 정 후보는 96년까지 18년 간의 기자 생활을 통해 질곡의 현대사를 최일선 현장에서 겪었다. 5ㆍ18민주화운동 때는 도보로 광주시내에 들어가 빗발치는 총성을 들으며 도청 앞에서 취재했지만 그의 리포트는 보도되지 못했다. 주미특파원 시절에는 걸프전과 독일 통일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88년 4월 13대 총선 때의 한 사건은 그의 언론관을 보여 준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 소속 후보가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우편으로 돈 봉투를 배달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이 시절 보도국에서 이런 종류의 기사가 보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던 사람은 없었다. 마감뉴스를 진행하던 정 후보는 회사를 그만 둘 각오로 이 기사를 톱뉴스로 내보냈다. MBC보도국이 발칵 뒤집혔다.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을 최초로 보도하기도 했다.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영입된 그는 전주에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화려한 정치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정치권에 발을 들인 연결고리가 바로 대학 친구였던 이해찬 전 총리다. 이번 경선에서 둘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워야 했던 것은 이런 점에서 아이러니다.

정계 입문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직접 정 후보를 기자실에 데려가 "당의 이미지 쇄신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97년 대선 때 정 후보는 김한길 의원과 함께 TV대책을 실무 지휘하며 정권 교체에 큰 기여를 했다.

권노갑 퇴진 정풍운동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정 후보는 2회 연속 전국 최다득표 당선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당선 이후 그는 8ㆍ30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대의원 35%의 지지를 얻으며 5위를 차지, 집권당 최연소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당시 정 후보의 폭발적인 연설 능력은 내내 화제가 됐다.

최고위원이 되자마자 그는 동교동계에 맞서 정풍운동에 나섰다. 2000년 12월 5일 조간신문에는 "정동영, 권노갑 2선 퇴진 요구"라는 활자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사흘 전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열렸던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중 정 후보가 말했던 내용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었다. 당시 정 후보는 김 대통령 앞에서 "국민의 눈엔 우리 당 권 최고위원이 YS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는 초선의원들의 의견을 전달했는데 이것이 정풍운동의 발단이 됐다.

정 후보의 발언은 여권 전체를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정 후보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고, 결국 12월 15일 권력의 정점에 있던 권 최고위원을 자진 사퇴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대권수업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을 처음 제안하고 완성해 낸 주역이 바로 정 후보다. 정작 본인은 4월 27일 서울 경선까지 8주일 동안 노무현 후보의 '들러리'를 자처했다.

하지만 이는 차세대주자로서 전국적 개인조직의 기반을 닦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정 후보는 당의 공식 선거조직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동안 자발적인 노무현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를 결집한 국민참여운동본부의 공동본부장을 맡아 노 후보와 전국을 돌았다.

그의 성장을 완성한 사건은 2004년 4ㆍ15 총선의 우리당 압승이다. 그는 탄핵정국을 맞아 '몽골기병론'을 내걸며 우리당의 152석 획득을 총지휘했다.

그러나 선거운동 과정에서 터진 노인 폄하 발언은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 어쨌든 그는 17대 총선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유력 대선주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2004년 시사저널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대통령감으로 가장 유력한 정치인'에서 그가 42.1%로 1위에 올랐다.

이어 그는 통일부 장관이 되면서 통일코드를 자신과 접목시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6ㆍ17면담, 북핵 위기를 해결한 9ㆍ19 공동성명 타결, 이산가족 화상상봉 시대 개막 등 그의 재임 시절 이뤄진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특히 설계도뿐인 개성공단을 100일 만에 가동시켰다.

장관 취임 직후 미국으로 날아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사 라이스 외교안보보좌관 등을 직접 만나 개성공단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동의를 얻어냈고, 2005년 말 허허벌판에 개성공단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정치인생 최대 위기에서 대선후보로 부활

그는 지난해 12월 부도 직전인 우리당 의장으로 컴백했다. 5ㆍ31 지방선거에서 4ㆍ15 총선 때처럼 속도감 있는 선거운동으로 전국을 누볐지만 우리당 출마자들에게 "6월 1일 아침 승리의 장미꽃을 직접 달아 주겠다"던 공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선거 막판 "싹쓸이만은 막아 달라"는 호소조차 무위로 돌아가 우리당은 무참히 참패했고, 6월 1일 그는 당의장을 사퇴했다. 이후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3개월여 간 머물면서 독일 통일정책 등에 대한 공부에 전념했다.

귀국 후 7ㆍ26 재보선 당시 서울 성북을에 출마할 것을 여권 핵심부로부터 권유받았지만 거부했다. 이를 두고 "몸사리고 투신하지 않는다" "정동영을 정계 은퇴시키려는 음모다"는 상반된 주장이 나왔다.

그를 다시 살린 것은 여권 대통합이었다. 그는 신당 창당에 적극 나섰고 마침내 원내 최대 정파의 대선후보로 다시 살아났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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