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가로 변신한 앨 고어 전 미 부통령과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가 공동 수상한 올해 노벨평화상은 역대 어느 때보다 미묘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7년만의 화려한 부활’이라는 보도에서 보듯 고어의 평화상 수상은 그에게는 영광이지만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는 수모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00년 플로리다주 대선에서 ‘억울하게’ 패배했던 고어는 이후 환경운동가로 절치부심한 7년을 노벨상 수상으로 마감하면서 다시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 때부터가 부시에게는 비극의 시작이라는 게 공교롭다.
이라크전 못지않게 부시 정부의 실정과 천박함을 드러낸 것은 환경정책이었다. 취임 초부터 석유자본에 굴복해 환경문제를 도외시한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기후변화 주요국 회의에서도 온난화의 심각성에 대해 궤변으로 일관, 각국 대표의 비난을 샀다. 내년 여름 기후변화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지만, 진정성은 땅에 떨어진 뒤였다.
노벨위원회가 고어에게 평화상을 안긴 배경에는 정치적 앙숙인 고어를 내세워 ‘쇠귀에 경읽기’인 부시 대통령을 압박하려는 의도도 작용했으리란 해석이다. 뉴욕타임스는 13일 사설에서 “이번 평화상이 부시 대통령을 고의적으로 모욕(slap)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연히 그런 것이어야 한다”며 “부시 대통령을 깨우는 자명종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논평했다.
노벨 평화상으로 선명해진 부시와 고어의 대립은 내년 미 대선에도 파장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고어가 다시 대선 캠페인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민주당에서 그의 수상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각별하다. 환경문제가 더 이상 자기 현시욕에서 나오는 이슈가 아니라는 것이 미국 유권자에게 각인됐다.
이는 환경문제에서 도덕적 우위를 지켜온 민주당에는 큰 호재이다. 부시 대통령이 고어에게 축하의 전화를 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으로 유력한 민주당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고어에게 곧바로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은 같은 맥락이다. 고어가 홀연히 나타난 ‘백마 탄 왕자’가 되기 보다는 민주당의 든든한 후원자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고어의 대선 불출마에 무게가 실려 있다. 평화상 수상으로 절정에 오른 고어가 다시 진흙탕으로 뛰어들어 스타일을 구기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요인에서부터 클린턴 의원이 대세를 장악한 뒤인 만큼 판세가 여의치 않다는 현실론이 근거이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NBC 방송의 시사프로 ‘투데이’에서 “대선에 출마하라고 권유하고 종용하는 전화를 고어에게 수차례 했는데 나중에는 ‘더 이상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고어가 IPCC 과학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온난화 문제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한다는 지적도 이번 평화상의 ‘정치성’과 관련해 음미할 만 하다. IPCC에 참가한 일부 과학자들은 “고어가 온난화를 과학적 근거 없이 허리케인이나 해수면 상승 등과 결부시키고 있다”며 온난화에 대한 과학적 노력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린란드의 빙하가 녹으려면 최소 1,000년 이상이 걸리는데 고어는 ‘가까운 장래’에 녹아 해수면이 수십cm 높아질 것이라고 경고한 게 한 예이다. 고어가 직접 제작, 출연한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에서 언급한 ‘9가지 광범위한 실수’도 대표적인 과장, 왜곡 사례이다.
노벨위원회는 “고어와 IPCC는 다르지만 둘 다 필요하다. 하나는 그 과학적 성과를, 하나는 선전성(publicity)을 우리는 존중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오해를 부르더라도 정치성을 동원해야 할 만큼 지구온난화 문제가 절박하다는 것이 노벨위원회의 생각인 듯 하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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