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 연하의 여인을 위해 권력과 국가 예산을 사용(私用)했던 고위 공직자의 모습은 측은하다 못해 비참했다. 1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위해 서울서부지법에 출두한 변양균(58)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비호 아래 미술계의 혜성으로 부상하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던 신정아(35)씨도 가짜 학위 파문에 휘말려 추락하고 말았다.
위험한 만남
권력과 가짜 박사의 잘못된 만남은 1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획예산처 행정예산국장으로 잘 나가던 변씨는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현대미술아카데미를 수강했다.
당시 강사는 금호미술관 큐레이터인 신씨. 고교 시절 미대 진학을 꿈꿀 정도로 미술에 심취해 있던 변씨와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20대 중반의 신씨는 예술에 관한 대화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둘의 관계는 2002년께부터 '연인' 사이로 발전한 듯하다. 가짜 예일대 학력이 들통나는 바람에 금호미술관에서 해고된 신씨가 갖은 노력 끝에 성곡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길 무렵이다. 검찰 관계자는 "신씨의 의도적 접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며 "다만 키도 크고 스타일이 좋은 신씨에게 미술애호가인 변씨도 끌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빗나간 사랑
연인들 앞에는 거칠 게 없었다. 변씨는 기획예산처 차관과 장관을 거쳐 지난해 7월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신씨 역시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승진했고 동국대 조교수라는 명예까지 거머쥐었다.
물론 그 뒤에는 변씨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산업은행 대우건설 등 기업체들로부터 10억여원의 미술관 후원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도 변씨의 후원 덕분이었다.
신씨는 산업은행에 후원을 요청하면서 "오빠 팔아서 김창록 (산업은행)총재한테 (성곡미술관) 협찬 받을테니 그리 아시라"는 이메일을 변씨에게 보냈고, 주변에는 "예일대 선배(변씨) 꼬드겨서 대우건설에서 1억 받아냈다"고 자랑도 늘어놓았다. 동국대 교수 임용 역시 2005년 6월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재직하던 변씨가 홍기삼 동국대 총장을 직접 만나 부탁한 결과였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쩡아에게' '쩡아가 오빠에게'라는 문구를 써가며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변씨는 '너네 집에서 치킨 시켜먹을까?' '오늘 저녁에 만날까?'라는 내용의 연서를 보내고 고가의 목걸이도 선물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에 임명된 뒤 변씨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 서머셋팰리스 레지던스호텔에 방을 구했고, 곧이어 신씨는 변씨의 임시거주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종로구 세종로 오피스텔 '경희궁의 아침'으로 이사했다.
예견된 추락
위기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시작됐다. 동국대 이사 장윤 스님이 "신씨가 가짜 학위 소유자"라는 의혹을 제기했다가 5월 이사직에서 해임된 것이다. '고졸 학력 여성의 아찔한 사기극'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정부 최고위층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8월 말 변씨가 신씨의 가짜 학위를 비호한 정황이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
변씨는 "공무원 30년을 바르게 산 사람"이라고 반박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 말에 속아 "깜도 안 되는 의혹"이라고 감쌌지만 검찰 수사에서 확인된 것은 두 사람의 빗나간 사랑이었다.
가짜 학위로 '미술계의 신데렐라'를 꿈꿨던 신씨의 꿈은 애초부터 허망했다. 변씨의 몰락도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적격자인 신씨를 교수로 밀어올린 부당한 권력 행사로 변씨는 신씨와 한 통속이 됐다. 도대체 변씨는 신씨의 가짜 예일대 박사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여전히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주희 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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