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시간의 흐름을 민감하게 느낀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돌고 하늘이 한껏 높아지는 걸 보니 가을 속으로 훌쩍 들어간 모양이다.
● 앞모습 못지않은 솔직함
해마다 이맘 때 즈음이면 책 냄새가 그리워 책방으로 발길을 돌리곤 하는데, 언젠가 우연히 집어 든 매혹적인 책이 생각난다. 미셸 투르니에의 글에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이 어우러진 <뒷모습> 은, 우리네 뒷모습에도 형형색색의 표정과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구나,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던 책이었다. 뒷모습>
이후 주위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관찰해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뒷모습 속엔 그 풍부한 표정 못지않게 본인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솔직함이 묻어 나옴을 깨닫게 되었다.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사회는 한 편의 거대한 연극 무대와 같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들은 모두 사회가 부여해준 각본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는 배우와 같은 존재요, 상황에 따라 상대가 원하는 모습에 맞추어 자신의 "인상관리"를 수행하는 속에서 연기력을 평가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데 우리의 뒷모습만큼은 뜻대로 마음대로 인상관리가 잘 안 되는 듯 하다. 나의 절친한 친구는 누가 보아도 훌륭한 선생이요 자상한 아내이자 따뜻한 엄마이지만, 뒷모습엔 언제라도 일상을 벗어나고픈 방랑기와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 외로움이 가득 담겨있다.
그런가 하면 선생 앞에서는 영락없는 모범생이지만 돌아서서 가는 뒷모습에선 호시탐탐 일탈을 꿈꾸는 반항아 기질이 농후한 제자 녀석들도 여럿 보았고, 앞모습은 그 누구보다 겸손하고 예의 발라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지만, 뒷모습에선 어쩔 수없이 거만함과 오만함이 묻어나오는 사람과도 종종 마주치곤 한다.
뒷모습을 떠올리자니, 지금도 여전히 가슴 가득 따뜻함이 밀려오는 한 어른과의 만남이 생각난다. 그 어른은 지금쯤 칠순을 훌쩍 넘기셨을 텐데, 마산에서 '합포문화동인'이란 모임을 햇수로 30년 이상 이끌어오고 계신 조 회장님이시다.
처음 문화동인을 시작하던 당시는 행여 정치에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색안경 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마산 같은 지방도시에도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관조하면서 각박한 세태지만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고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문화동인이 있어야 함을, 일찍이 인식했던 회장님의 혜안과 사심 없음에 모두들 감사하고 있다 했다.
그 인생길을 오롯이 닮아 있던, 참으로 정갈하면서도 당당함과 꼿꼿함 속에 여유를 간직하고 계셨던 회장님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니 '전직 대통령이란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란 평을 받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야말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반열에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에야 비로소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을 당당히 인정받은 사람,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집 없는 이들을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해비타트 운동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 현직 대통령 낙선이란 좌절을 딛고 지금은 '나이 듦의 미덕'을 풍성히 보여주고 있는 사람, 그를 위해 세상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과 따스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 곁에 좋은 지도자 많았으면
최근 대통령 후보 선출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무대 전면에서 화려한 연기를 펼친 후 쓸쓸한 퇴장을 앞두고 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바라건대는 무대 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뒷모습에 투영된 발자취가 아름다운 지도자들을 우리 곁에 많이 두었으면 한다.
혹 무대 위에서 잊을 수 없는 실수를 했을지언정 그 진솔함으로 인해 너그러이 용서 받을 수 있는 지도자, 돌아서는 뒷모습에 당당한 소신과 더불어 국민을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오는 그런 지도자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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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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