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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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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입력
2007.10.1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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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 실천문학사"문학과 고고학은 같은 것"… 고통을 '국 끓이는' 女司祭

자료를 뒤적이다 1592년 오늘이 임진왜란에서 진주대첩을 거둔 날이라는 기록을 본다. 진주라…. 느닷없이 앳된 맨얼굴의 한 ‘진주 가수나’가 떠오른다. 독일에 있는 시인 허수경(43)이다.

2000년 4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한국문학작품 낭독회’ 취재를 갔을 때 허수경을 만났다. 그곳에서 고속열차로 두 시간 거리의 뮌스터에서 고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허수경이 낭독회 소식을 듣고 온 것이다.

직접 본 건 처음이었지만 그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1988) 표지에서 봤던, 단발머리 여학생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허수경이 절친한 소설가 신경숙 등 낭독회 참석 문인들과 이틀을 보내고 다시 뮌스터로 떠나던 날, 그 작은 체구에 어리던 저 쓸쓸함.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첫 시집의 표제작이 된 시 ‘탈상’의 전문이다. 1980년대 말의 한국사회, ‘여게가 친정인가 저승인가’(시 ‘그믐밤’에서) 싶던 시대에 역사성과 민중성, 그리고 여성성을 담보한 농익은 언어로 허수경의 시는 빛났다.

저주와 은총을 함께 받은 ‘진주 남강 선술집 주모’(소설가 송기원)이거나, 고춧가루와 세계를 솥에 집어넣고 ‘국 끓이는 여사제’(평론가 성민엽)였다. 어쨌든 그 사이 허수경은 결혼하고, 2006년에는 고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에서 새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을 냈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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