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즈강(江) 가두리의 콩피에뉴는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도시다. 파리 북역(北驛)에서 기차를 타면 한 시간 15분쯤 뒤에 닿는다. 요즘엔 더 빠른 기차가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1990년대 후반엔 그랬다. 가는 동안의 차창 밖 풍경이 아리땁다. 특히 그 때가 늦은 봄에서 여름 사이라면 더욱 그렇다. 녹음이 서늘하게 짙고 꽃들이 사방에 만발해 있을 게다.
콩피에뉴역은 우아즈강 바로 북안(北岸)에 서 있다. 역을 나와서 솔페리노 다리를 건너면, 인구 4만 남짓의 이 작은 도시를 북서에서 남동으로 꿰뚫는 솔페리노 거리가 나온다. 솔페리노 다리 주변 풍경은 내 기억 속의 가장 살가운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그 살가움은 그 다리 위에 함께 서있던 사람들의 이미지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렇거나, 우아즈강 주위로 늘어선 건물들이 하늘과 빚어내는 스카이라인은 파리 생미셸 다리 근처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 못지않게 우아하다. 그 건물들이 파리의 것보다 오밀조밀해 정겨움은 더하다. 강안(江岸) 잔디에 벌러덩 누워서 햇살을 쬐며 한숨 붙이노라면, 세상만사가 문득 시시하다.
솔페리노 거리를 따라가면 콩피에뉴 시청이 나온다. 시청 건물 앞에 잔 다르크 동상이 서 있다. 콩피에뉴는 이 백년전쟁의 영웅이 태어난 곳도 아니고 죽은 곳도 아니다. 잔 다르크가 태어난 곳은 동레미라퓌셀이고, 사실상의 정치재판이었던 종교재판에서 그녀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곳은 루앙이다.
그녀를 흔히 ‘오를레앙의 성녀(聖女)’라 부르는 데서도 드러나듯, 잔 다르크라는 이름은 온몸을 흰옷으로 두른 이 처녀 전사가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킨 오를레앙시와 가장 긴밀히 관련돼 있다.
그러면 왜 콩피에뉴 시청 앞에 잔 다르크의 동상이 서 있는가? 이 도시에서 그녀의 무용담이 끝났기 때문이다. 1430년 5월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를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지켜내려다 부르고뉴 사람들에게 붙잡혔고, 부르고뉴 지도자는 그녀를 잉글랜드군에게 팔아넘겼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잔 다르크는 동족에게 사로잡혀 적군에게 팔린 셈이지만, 당대 부르고뉴 사람들 처지에선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 국왕의 주권이 거의 미치지 않았던 부르고뉴공국은 정치군사적 이해관계를 외려 잉글랜드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욕을 먹어 싼 것은 당시의 프랑스 국왕 샤를7세다. 그 즈음의 전쟁포로들은 포로 가족이 몸값을 내면 풀려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잔 다르크의 수중에도, 그녀의 가족에게도 부르고뉴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돈은 없었다. 샤를7세가 개입해서 돈을 댔다면, 잔 다르크는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속 좁은 국왕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준 여자가 뒷날 프랑스 역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한 상상력이 모자랐다. 그는 잔 다르크를 질시하는 측근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 그녀의 비극적 죽음을 팔짱끼고 지켜보았다.
그 여자의 헌신과 용맹이 아니었다면, 프랑스 왕위는 잉글랜드 왕이 겸하게 됐을 텐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샤를7세가 임진왜란 때의 선조 같은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잔 다르크가 죽은 뒤 헌걸찬 지도력을 보이며 내전과 백년전쟁을 끝냈고,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프랑스 중흥의 기초를 닦았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애국주의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옆 피라미드 광장에 서있는 동상을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 이 여자의 동상이 적잖이 세워져 있다. 잔 다르크 축제도 여럿 있다.
콩피에뉴에서도, 그녀가 사로잡힌 5월23일 잔 다르크 축제를 연다.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잔 다르크 축제에 가장 열심인 사람들은 극우파다. 국민전선과 그 지지자들은 프랑스인들의 배타적 애국심을 동원하기 위해 이 이름을 지겹도록 들먹인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유럽사와 세계사의 숙적이었고, 그래서 유럽 대륙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의 식민지에서 수도 없이 전쟁을 벌였지만, 그 가운데 프랑스가 이긴 전쟁은 거의 없다. 아마 백년전쟁이 프랑스가 승리한 거의 유일한 전쟁일 것이다. 그러니 잔 다르크에게 프랑스의 애국주의자들이 열광하는 것도 그럴 법하다.
그러나 백년 넘게 싸움터 노릇을 하느라 쑥대밭이 된 건 프랑스였으므로,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건 프랑스인들로서도 좀 쑥스러운 일일 게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16세기 말 동아시아 7년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게 민망하듯 말이다.
르노자동차의 광고 카피 가운데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의 첫 잉글랜드 침공”이라는 게 있었다. 노르만 정복이란 1066년 노르망디공 윌리엄(프랑스어식으로는 기욤)이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영불해협을 건너가, 앵글로색슨 왕조를 몰아내고 윌리엄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군주가 된 사건이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 지배계급은 영어 대신 제 고향 노르망디의 언어, 즉 프랑스어를 썼다. 르노자동차 광고카피는, 노르만정복 이후 천년 동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땅을 휘저은 적은 있어도 프랑스군이 잉글랜드에 발을 들여놓은 적은 없다는 뜻이다.
르노자동차가 영국에 수출되고 있는 것을 1000년만의 잉글랜드 침공이라 떠벌림으로써, 잉글랜드와 그 이후 영국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역사적 콤플렉스를 마케팅에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말하면, 노르만 정복도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르만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그 시절 노르망디 지배계급의 조상은 북유럽에서 왔고, 노르망디공 역시 형식적으로만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노르망디공국은 파리나 랭스(프랑스 국왕들은 이 도시에서 대관식을 올렸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콩피에뉴 시청을 마주보고 왼쪽으로 돌아 300m 정도를 걸어가면 콩피에뉴궁이 나온다. 이 궁전은 몇 개의 로맨스를 간직하고 있다. 1770년, 프랑스 왕세자 루이-오귀스트(뒷날의 루이16세)는 이 궁전에서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음 만났다.
16세 소년과 14세 소녀는 곧바로 결혼했고 이내 프랑스왕국의 지배자가 됐지만, 뒷날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리 콩코르드광장에서 9개월 시차를 두고 처형됐다. 그 혁명을 탈취해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첫 번째 아내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를 이 궁전에서 맞아 혼례를 올렸다.
궁전 뒤로는 숲이 펼쳐진다. 넓이가 1만5천 헥타르에 이르는 콩피에뉴 숲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불로뉴 숲이나 뱅센 숲 같은 파리 주변의 되다 만 숲이 아니라 진짜 숲이다. 인적도 드물다. 그렇지만 무섭다는 느낌을 주진 않는다. 루이 14세와 나폴레옹1세의 연애가 떠올라 외려 로맨틱한 느낌이다.
비록 숲속의 승마장 주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똥들이 산책자를 로맨스의 환상에서 끌어내곤 하지만.
콩피에뉴 숲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정전협정이 두 차례 이뤄진 곳이다. 첫 번째 정전협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11일 이뤄졌고, 두 번째 정전협정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0년 6월21일 이뤄졌다. 첫 번째 정전협정에선 프랑스가 승자였고, 두 번째 정전협정에선 독일이 승자였다.
히틀러는 어렵지 않게 프랑스를 굴복시킨 뒤 일부러 이 곳을 골라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보다 20여 년 전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받았던 굴욕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는 1918년의 정전협정 때 서명 공간으로 사용됐던 바로 그 객차를 파리에서 콩피에뉴 숲으로 옮기게 한 뒤, 양쪽 서명자의 의자 위치만 맞바꾸어 누가 승자인지를 프랑스인들에게 생생히 알려주었다. 히틀러가 편집광이었다는 얘기는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콩피에뉴 경치에 한눈을 팔다 점심시간을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식당이 있다. 시청을 마주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콩피에뉴 숲 반대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닿는 중국음식점 홍콩이다. 그 집 음식이 특별히 맛있다고 얘기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오후 3시 가까이가 되면 손님들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하는 여느 레스토랑과 달리, 홍콩은 미안하다 싶을 만큼 고객 위주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 오후 내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다 해도, 홍콩은 당신에게 여전히 친절하고 여전히 공손할 것이다.
하긴 그 집이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홍콩에 들른 게 1997년 겨울이다. 그 날도 어중간한 시간에 들어가 두어 시간 너머 먹고 마시며 종업원들에게 폐를 끼쳤다. 한없이 느긋하게 입에 넣던 베이징수프와 탕수육이, 무통 카데 와인이 그립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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