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접어 들면서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변한 것은 갑자기 바뀐 날씨 뿐만이 아니다. 이번 달 국내 프로 바둑계 랭킹 판도 역시 천변만화다.
최근 한국기원이 발표한 10월 국내 프로기사 랭킹에 따르면 이창호가 간발의 차이로 이세돌을 따돌리고 3개월째 1위를 지켰다. 이창호와 이세돌은 금년 들어 서로 엎치락 뒤치락, 이창호(1월) - 이세돌(2, 3, 4월) - 이창호(5월) -이세돌(6,7월) - 이창호(8, 9, 10월)로 이어지는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고정 좌석 같았던 3, 4, 5위에도 변화가 있었다. 박영훈이 3개월째 3위 자리를 지켰고 지난 8월 3위에서 4위로 내려간 최철한은 이번 달에 다시 조한승에 밀려 5위로 하락했다. 2005년 8월부터 랭킹 제도가 도입된 이래 처음으로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최철한’의 4천왕 체제가 깨진 것이다.
■이창호
국내 프로 바둑계 ‘톱 5’의 최근 성적을 날씨로 비유하자면 랭킹 l위 이창호는 ‘흐림’이다. 지난 2년간의 성적을 통합해서 집계하는 현행 랭킹 산정 방식 덕분에 쌓아 놓은 랭킹 점수가 워낙 많아서 1위를 3개월째 유지하고는 있으나 내용 면에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창호는 연초부터 출발이 좋지 않았다. 1월에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창하오에 2연패 당한 것을 시작으로 국수전 후지쯔배 전자랜드배 등에서 잇달아 우승을 놓쳤다.
7월에 마지막 남은 타이틀인 왕위를 지켜 간신히 무관 위기에서 벗어난 이창호는 8월 중환배 우승으로 체면을 지켰으나 삼성화재배와 LG배 모두 8강 진출에 실패했고 농심배에서도 예선 탈락 후 와일드카드로 선정돼 간신히 출전권을 얻었다.
또 국내 최대 기전인 명인전 본선 리그에서 공동 4위에 그쳤고 GS배에서도 성적 부진으로 2년 연속 차기 대회 시드 배정을 받지 못했다. 이창호가 국내 양대 리그전인 명인전과 GS배에서 모두 탈락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상반기 중 극심한 컨디션 난조를 보였던 이창호. 하반기 들어 조금씩 몸상태가 회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올해 성적이 44승28패로 승률이 61% 밖에 안 된다. 특히 지난 9월 이후 최근 아홉 경기에서 계속 이겼다 졌다를 반복하며 반타작 승부에 머물고 있어, 과연 전성기 때의 기량을 회복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세돌
반대로 랭킹 2위 이세돌의 바둑 날씨는 ‘쾌청’이다. 비록 랭킹 점수는 이창호에 조금 뒤지지만 9일 현재 65승13패(승률 83%)로 다승 2위, 승률 1위를 달리고 있으며 국내외 타이틀 6개를 보유하고 있다. 자타가 인정하는 실질적인 1인자다.
이세돌의 강점은 꼭 이겨야 하는 바둑은 반드시 이긴다는 것. 아깝게 진 경기는 지난 4월 후지쯔배 본선(상대 장쉬)과 7월 농심배 예선 결승(상대 조한승) 정도다. 그 밖에는 거의 모든 국내외 기전에서 거뜬히 살아 남아 순조롭게 정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지난 주부터 시작된 강원랜드배 명인전 결승 5번기 첫 판을 이겼고 국수전에서는 무명 신예 최기훈과의 도전자 결정전 3번기에서 선승, 도전권 획득이 유력하다. 또 8일 열린 기성전 16강전에서 김성룡을 누르고 8강에 진출했고 11일에는 천원전에서 원성진과 준결승전을 벌인다. 또 삼성화재배와 LG배에도 모두 8강에 올라 있다.
이 같은 기세라면 올해 10관왕 달성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박영훈
랭킹 3위 박영훈은 ‘맑음’이다. 올해 성적은 52승18패, 다승 8위지만 승률은 4위(74%)다. 특히 지난 4월 기성전에서 최철한을 꺾고 우승한 데 이어 7월에 후지쯔배에서 이창호를 누르고 세계 타이틀을 따낸 게 컸다. 가히 일당백이다. 덕분에 지난 8월에는 랭킹 제도가 도입된 이래 처음으로 최철한을 누르고 ‘넘버 3’로 올라 섰다.
또 삼성화재배 8강에 진출해 있으며 농심배 출전권도 따냈다. GS배에서는 6승으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어 도전권 획득이 유력하다. 맥심배와 원익배 본선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소리 없이 실속을 챙기고 있다.
■조한승
이번 달에 처음으로 랭킹 4위에 오른 조한승은 ‘갬’이다. 구름 속에서 서서히 밝은 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이세돌을 누르고 천원전에서 우승, 당당히 타이틀 보유자 대열에 합류한 조한승은 올해 국내 최대 기전인 명인전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강자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승부 근성이 ‘2% 부족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조한승에게 이번 명인전은 실로 명예 회복의 장이었다. 본선 리그에서 초반에 3패를 당하고도 이후 동률 재대국까지 내리 5연승을 거둬 끝내 결승 티킷을 따내는 끈질긴 투혼이 빛났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 지난 2일 벌어진 이세돌과의 명인전 결승 1국에서 초반에 유리했던 바둑을 아쉽게 역전패했지만 작년 천원전에서도 먼저 한 판을 내준 다음 내리 세 판을 이겨 우승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조한승은 지난 7월 농심배에서도 이세돌의 24연승을 저지하면서 본선에 진출, 아직도 자신이 ‘이세돌의 천적’임을 과시했다.
조한승은 8일 벌어진 바둑왕전 본선 대국에서 최철한을 누르고 승자 결승에 진출했을뿐더러, GS배 본선 리그에서도 현재 5승1패로 단독 2위를 기록중이다. 11일 열리는 선두 박영훈(6승)과의 대국에서 승리할 경우 다시 동률 재대국을 통해 도전권을 다투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명인전에서처럼 막판 역전극을 이뤄낼 지 주목된다.
■최철한
랭킹 5위 최철한의 현재 기상 상황은 한마디로 ‘먹구름’이다. 올해 성적은 40승26패(승률 61%)로 다승 15위, 승률 32위에 올라 있다. 정상권 기사로서는 크게 미흡한 성적이다. 더구나 최근 중요한 경기에서 이긴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국 기회도 줄어 든 나머지 지난 달에는 불과 3판을 두어 1승2패를 거두는 등 랭킹 점수는 계속 떨어졌다. 랭킹제 도입 이후 2006년 1월에 반짝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창호 이세돌에 이어 줄곧 3위에 머물렀다.
그러다 지난 8월 처음으로 ‘송아지 삼총사’ 멤버인 동갑나기 라이벌 박영훈에게 3위 자리를 내줘 암운을 예고했다. 이번 달에는 조한승에게도 밀려 5위로 떨어졌다. 이 같은 추세라면 내년에는 랭킹 순위가 더욱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돌이켜 보면 최철한에게는 올 2월에 기성전에서 도전권을 따낸 게 처음이자 마지막 찬스였다. 그러나 박영훈과의 타이틀매치에서 2연패를 당해 힘없이 물러난 이후 슬럼프에 빠졌다.
현재 한국바둑리그에서도 6승5패로 지난해 우승팀 KIXX가 하위권을 헤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GS배 본선 리그에서 3승3패를 기록하고도 리그 서열이 높아서 간신히 본선 시드를 확보한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박영철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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