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ㅟ’자에 ‘ㄱ’만 붙이면 ‘귀’가 됩니다. 자, 따라 읽어보세요. ‘귀’한 사위 내외가 오네요.”
5일 밤 경남 하동군 청암면 지리산 자락 시목마을에 들어서자 불이 환하게 켜진 마을회관에서 한글을 배우는 듯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훈장님’을 따라 한글 한 자 한 자 따라 읽으며 ‘한글 배우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학생들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70세 이상 할머니들이다. 검게 탄 주름진 손으로 연필을 쥐고 열 칸 공책에 글자를 쓰느라 진땀을 빼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즐겁다.
‘감나무 마을’이라는 뜻인 시목(枾木) 마을에 ‘한글학당’이 자리잡은 것은 지난해 12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할 정도로 높은 한자 실력을 지닌 정일영(68)씨에게 할머니들이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졸라 마을회관에 배움의 자리를 마련했다.
정씨는 “할머니들이 ‘혼자서만 공부하지 말고 함께 하자’고 던진 말이 가슴에 와닿아 한글을 가르치게 됐다”며 “학생들이 어찌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신바람이 난다”고 말했다.
한글 수업은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7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된다. 할머니들이 온종일 농사를 짓느라 피곤할 법한데도 난생 처음 배워보는 재미에 푹 빠지는 바람에 수업시간은 오후 10시를 넘겨 끝날 때가 부지기수다. 여름 뙤약볕과 장마도 할머니들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할머니들이 처음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사실 ‘한글을 그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글자도 비뚤배뚤 했고, 자신의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반년이 훌쩍 지난 요즘은 외지에 있는 손자 손녀들에게 직접 편지를 쓸 정도로 글맵시를 뽐낸다.
김수덕(77) 할머니는 “길을 걷다 간판, 표지판을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하나 읽어본다”며 “글 배우는 재미 때문에 밭에서 일을 해도 힘이 들지 않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즐거워 했다.
한글 학당 할머니들이 글조차 배우지 못하고 한 많은 인생을 살게 된 것은 “여자가 글을 익혀 무엇에 쓰겠냐”는 편견 때문이었다. 유화순(80) 할머니는 “옛날에는 여자들이 글을 배우면 시댁을 못 살게 만든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면서 “까막눈이라 불편한 건 참겠는데, 내 자식 글도 볼 수 없다는 건…”이라며 마디 굵은 손으로 연필을 꼭 쥐었다.
한글을 몰라 각종 고지서만 보면 답답했다는 조동댁(68) 할머니는 100점을 받은 받아쓰기 노트를 내보이며 연신 자랑이다. 곁에서 할머니의 글쓰기를 도와주고 있던 아들 김태형(32)씨가 “우리 엄니 박사네”라고 외치자 한글학당엔 “와” 웃음꽃이 피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에 감복했는지 할아버지들도 할머니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초기엔 5㎞ 이상 거리를 걸어서 마을회관까지 등교했지만 이젠 할아버지들이 준비한 ‘스쿨 경운기’를 타고 통학하고 있다. 할아버지들은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운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과연 할 수 있을까’하고 의구심을 가졌지만 이젠 폐휴지와 빈병 등을 모아 한글 교재와 노트, 연필을 사주는 등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고 있다.
이장 김한수(64)씨는 “열심히 공부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진작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다”면서 “주민들도 응원하러 ‘한글학당’에 자주 모이게 돼 할머니들의 한글 공부는 마을의 화합까지 유도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며 함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박관규기자 qoo7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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