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안 내내 TV앞에 앉아있었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승부수로 여겨질 수도 있는 미디어 이벤트가 방송에서 어떻게 보도되는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TV화면에 비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아슬아슬한 힘겨루기는 홈그라운드가 아니었는데도 일단 노 대통령이 우세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김 위원장은 손님을 맞는 태도로 보기 힘들 만큼 얼굴 표정이 굳어있었다. 처음 악수를 나눌 때는 노 대통령이 더 긴장한 듯했고, 권양숙 여사도 어디에 서야 할지 주춤하는 모양새였다. 곧 이어 북한 육해공 삼군의 사열식이 있었다.
길게 휘어진 칼을 뽑아 든 의장대장이 김 위원장을 향해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직함을 나열하며 “위대하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조선로동당 총비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셨다”는 식으로 사열 시작을 보고했다. 무슨 이유인지 이때 음성은 국내 방송에서 삭제됐다. 하지만 NHK에서는 힘이 한껏 들어간 그 신고 소리가 그대로 방송됐다.
이 소리를 들어보면, 4ㆍ25 문화회관 환영식은 남쪽 방문객을 겁주려는 인상까지 풍겼다. 여기에 권 여사는 의전에서 거의 무시당하는 식으로 비춰졌다. 한쪽으로 비켜서고 또 레드 카펫 바깥으로 걷게 했다. 대통령 옆에 있어야 할지, 뒤에서 쫓아가야 할지, 아니면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하는 건지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다.
영부인에 대한 의전이 저 정도니, 북측도 여성을 배려하거나 대우하는 수준이 남측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나아 보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권 여사가 누구인가?
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에 장인의 좌익 경력이 문제되자 “그렇다면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며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그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북측에서 누구보다도 환영해야 할 인사는 권 여사가 아닌가? 하지만 “위대하신 수령 동지”를 아버지로 둔 김 위원장은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밑에서부터 올라온 노 대통령 부부를 제대로 환영했다고 볼 수 없다.
모택동식 복장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이 북한을 지배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의 후손까지 진심으로 환영하지 않음을 TV화면으로 보여준 셈이다. 반면 노 대통령은 평상을 회복하고 환호하는 평양시민에게 손을 흔드는 여유를 보였다.
첫날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김 위원장은 또 다시 ‘깜짝 제안’을 했다. 노 대통령에게 “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냐”며 정상회담 일정을 하루 더 연기하자고 했다. 순발력과 임기응변에선 노 대통령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노 대통령은 “나보다 더 센 데가 두 군데 있는데, 경호, 의전 쪽과 상의해야 한다”고 예봉을 피했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은 “대통령이 결심하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께서 그것도 결정 못하십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큰 것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이 대화는 북측에선 김 위원장의 말이 곧 법이며, 그의 말이라면 예정에도 없이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음을 가정한다. 하지만 남측에선 대통령이 할 수 없는 “작은 일”이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나아가서 김 위원장의 제안을 “작은 일”로 규정해, 그가 스스로 자신의 제안을 철회하게 만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서울로 오는 길에 서해갑문에서 “인민은 위대하다”고 방명록에 남겼다. 어느 쪽이 과연 인민을 진정으로 위하는지 TV화면에서 판가름 났기 때문일까?
심재철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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