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를 괴짜 선생님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렇게 불러주는 게 좋아 더 열심히 발명을 했습니다.”
고추 농사꾼 박희열(66)씨의 별명은 ‘발명왕 교장 선생님’이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입암중에서 2004년 2월 교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43년간 교직에 몸담은 그는 그 기간동안 각종 과학전람회에서 30여 차례나 상을 받았다.
거기에는 대한민국학생발명전, 전국교원발명품경진대회 등 굵직굵직한 대회가 포함돼있다. 그런 그가 요즘 영양의 특산물인 고추를 재배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교직에 있을 때에도 틈틈이 작은 규모의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전문 농사꾼이 된 것이다.
‘과학교사에서 농사꾼으로’. 한 사람의 변신 경로치고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지만, 그가 평생 매달려 만든 발명품 대다수가 농사를 보다 편하게 짓기 위한 농기구라는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실제로 박씨의 고추 농사에서는 그가 만든 발명품이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가장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은 고추말뚝 뽑는 기계. “고추를 가지런히 심기 위해 말뚝을 박는데, 박을 때는 쉽지만 뽑을 때는 땅이 굳어져 여간 어렵지 않다”는 박씨는 “내가 발명한 기계를 사용하면 누구든 5초에 하나씩 손쉽게 뽑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
통상 2인1조로 하는 농약 뿌리기를 혼자 할 수 있게 고안한 제품도 있다. 경운기용 다용도 전구는 야간 작업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붉은 빛 고추가 쌓인 그의 비닐하우스 한 쪽에는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온갖 약재가 가득하다. 화학비료 대신 토착미생물을 배양한 농약을 만들기 위해서다.
박씨는 “소동나무, 역귀, 녹말풀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초로 배양하는 미생물은 병충해를 없애주는데다 사흘도 되기 전에 독성이 사라져 토양이 기름진 상태를 유지하도록 도와준다”며 “여기에 보약 격인 쑥, 미나리, 칡 등을 섞으면 튼실한 고추를 대량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 교사로서 얻은 지식을 총동원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의 고추 비닐하우스는 또 다른 실험실, 또 다른 연구실이다.
이처럼 농사에 과학기법을 동원해도, 그의 겉 모습에서 과학자의 면모를 찾기는 쉽지 않다. 43년 을 교직에서 보낸 사람에게서 묻어날법한 권위의식이나 깐깐함 등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씨 좋고 수더분한 촌부의 얼굴이 포근하고 편안하다.
농촌에 대한 그의 남다른 태도는 그가 도회지 생활을 해본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울릉도에서 4년간 교편을 잡았지만 나머지 40년은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영양, 청송, 봉화 등에서 보냈다. 경북의 오지라는 곳이다. 대다수 교사들이 그곳 근무를 기피했지만 그는 부모가 있고 가족이 있는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굳은 의지 때문에 자원근무를 요청했다.
그는 입암중에서 교사, 교감, 교장까지 10년 넘게 근무하는 동안 집에서 4㎞가 넘는 출퇴근길에 단 한번도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녔는데 그것이 발명으로 이어졌다. 출퇴근 길에 주워 모은 어마어마한 양의 농기계 부속품이 모두 발명품의 재료로 활용된 것이다.
기록하고 메모하는 습관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그의 농사일지에는 매일매일 시간대별 기록이 빼곡히 적혀있다. 일지를 열면 1년 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나리오처럼 펼쳐진다. 기록을 보면 그가 단돈 10원 짜리 하나 허투루 쓴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쯤이면 적지 않은 돈을 모았을 법도 한데, 그가 거주하는 곳은 방 2칸짜리의 허름한 시골집이다. 이 집은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아내 조영자(68)씨가 “평생 발명에 미쳐 돈을 갖다 버렸으니 무슨 돈을 모았겠느냐”며 웃는 것을 보면 발명에 적지 않은 돈을 쓴 것이 틀림없다.
아직은 초보 고추 농사꾼이지만 두 가지 큰 목표가 있다. 영양고추 중에서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지만 병충해에 약해 수확량이 적은 수비초의 대량 생산법을 찾아내는 것이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만든 농업 발명품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다.
박씨는 “고추 농사는 또 다른 발명 인생의 시작”이라며 “최적의 고추농법을 개발해 보다 많은 지역 주민에게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영양=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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