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지금부턴 패자부활전 문젭니다. 다음 중 지금 완전히 사라진 직업은 무엇일까요? 1번 마부, 2번 성냥제조원, 3번 타자수….”
스케치북 위로 굵은 유성펜이 슥삭거리기 시작한다. 내신이 걸린 시험문제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뒷자리에선 옆에 앉은 짝과 답을 ‘상의’하기도 한다. “타자수가 뭐냐?” “말 끄는 마부가 과연 지금도 있을까?” 이윽고 답을 적은 학생들은 교탁 앞에 서 있는 강사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 본다. “답은 2번이죠. 지금도 성냥이 나오기는 하지만 기계로 찍어내지, 사람이 직접 만들진 않아요.”
경기 안산시 대부도 한가운데 위치한 대부중학교에 지난달 29일 ‘파란 조끼를 입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한국고용정보원 직업진로센터 직원들로, 한 두 달에 한 번씩 벽지 학교를 돌며 ‘찾아가는 직업ㆍ진로 교육’을 하고 있다.
70여명의 대부중 3학년 학생들은 퀴즈를 풀며 몰랐던 직업의 세계를 배우고, 자신에게 어떤 직업이 맞는지 ‘직업적성검사’도 받았다. 이 중 가장 인기를 끈 프로그램은 ‘로봇 만들기’. 손뼉을 치면 움직이는 푸른 도마뱀 모양의 로봇을 만드는 일인데, 여러 직업 중 하나인 로봇공학자의 역할을 체험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국내에 1만 개가 넘는 직업이 있다는 직원들 설명에 학생들의 입은 딱 벌어졌다. 도시 학생들에겐 익숙하겠지만 호텔 한 곳만 봐도 ‘도어맨’‘룸메이드’ ‘컨시어지’등 각종 직업이 즐비하다는 말에 여기저기서 “그게 뭔데”하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선수와 TV프로듀서 중 어떤 걸 할까 망설이고 있다는 정유진(16)군은 “세상에 직업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며 “그 동안 내가 가질 직업에 대해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부턴 진지하게 알아보고 고민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대부중은 개교한 지 50년이나 됐지만 전교생이 200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다. 이 곳 30여명의 교사들은 대부중과 함께 있는 대부고(전교생 180명) 수업까지 맡고 있다. 정보가 부족한데다 잔무량이 많아 진로 지도엔 항상 아쉬움과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대도시라면 시내 대형 쇼핑몰에서 각종 이벤트 관련 종사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접할 수 있지만, 농어촌 지역 학생들은 그럴 기회가 좀처럼 없다.
진은숙(48ㆍ여) 진로상담 부장교사는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세상엔 어떤 직업이 있는지 아는 대로 써 보라’고 했더니 20개를 넘게 쓰는 애들이 많지 않았다”며 “직업진로 상담도 보통 성적이나 고민 상담에 묻어가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직원들과 함께 이 곳을 찾은 권재철 한국고용정보원 원장은 “그 동안 우리 교육은 특목고다, 내신이다 해서 시끄러웠는데, 좋은 대학 나오고도 첫 직장이 적성에 안 맞아 옮기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며 “개인과 사회가 행복해지려면 제대로 된 진로지도가 진학지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도(안산)=박원기 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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