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오일 달러'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큰 손, '차이나 달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 중국이 29일 국가외환투자공사(가칭)라는 이른바 '국부(國富)펀드'(Sovereign Wealth Fund)를 공식 출범시킨다.
초고속 경제 성장으로 나날이 늘고 있는 외환보유액 중 일부인 2,000억달러를 펀드로 조성해 운용함으로써 나라의 부(富)를 더욱 늘려보겠다는 전략이다.
여기엔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더욱 넓혀 보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세계 금융시장은 숨을 죽인 채, 또 하나의 공룡 국부펀드 탄생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국부펀드가 세계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소수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아 공격적인 투자를 하며 금융시장을 뒤흔들어 온 투기자본인 헤지펀드를 규모 면에서나, 영향력 면에서 압도하는 양상이다.
오일 머니를 주요 자금원으로 하는 중동의 국부펀드와 싱가포르투자청(GIC) 및 테마섹이라는 걸출한 국부펀드를 배출한 싱가포르에 이어 중국까지 가세함으로써 국부펀드의 위력은 더욱 막강해질 전망이다.
2,500조원 주무르는 '큰 손'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운용되는 국부펀드의 규모는 6월 말 현재 2조5,000억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중국의 국부펀드까지 포함하면 2조7,000억달러에 육박한다. 우리 돈으로 2,500조원을 넘는다.
헤지펀드 시장 규모(1조5,000억달러 추정)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고, 국내 전체 상장기업(시가총액 1,077조원)을 두 번은 사고도 남는 돈이다. 2015년이면 국부펀드 시장이 현재의 4배 이상인 12조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나랏돈을 굴린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도 불구, 세계적인 국부펀드의 수익률은 연 10%에 육박한다. 지난해 처음 수익률을 공개한 싱가포르투자청(GIC)의 연평균 수익률은 과거 25년여간 9.5%에 달했다.
공격성 드러내는 국부펀드
글로벌 금융시장이 바짝 긴장하는 이유는 국부펀드의 규모 확대보다도 투자 성향의 변화에 있다. 최근 들어 '국부펀드 = 안정적 자산 운용'의 공식이 깨지고, 갈수록 '고위험 고수익' 투자에 눈길을 돌리는 추세다.
중국은 국부펀드가 공식 출범도 하기 전인 올해 5월 세계적인 사모펀드 블랙스톤의 지분 10%를 사들였고, 세계 최대 국부펀드인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투자공사는 칼라일그룹 지분 7.5%를 인수했다. 3,000억달러의 자금을 운용 중인 노르웨이의 국가연금펀드는 최근 주식투자 비중을 40%에서 60%로 늘리기로 했다.
헤지펀드는 투자자들에게 단기간에 고수익을 안겨줘야 하는 반면, 국부펀드는 장기 투자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국제 금융시장에 더 위협적이다.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가 우선할 수도 있다. 금융연구원 이규복 연구위원은 "국부펀드는 다른 나라의 기간산업을 인수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을 위협할 수 있다"며 "특히 중국이 원자재나 금융산업 인수에 큰 관심을 보임에 따라 세계 각국의 경계 대상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세계은행 등을 내세워 국부펀드의 지배구조와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규제안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초라한 한국의 국부펀드
각국의 국부펀드가 세계 금융시장을 위협하는 큰 손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국부펀드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2년 전인 2005년 7월 외환보유액 170억달러와 외국환평형기금 30억달러 등 총 200억달러를 위탁자산으로 출범한 한국투자공사(KIC)는 지난해 11월에야 겨우 10억달러를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데 그쳤다.
2개월간 수익률은 0.67%. 연 수익률로 환산해도 고작 4%를 넘는 수준이다. "미국 국채에만 투자해도 그 정도 수익률은 낼 수 있겠다" "중앙은행이 직접 운용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뭐냐"는 일각의 비판이 매섭게 쏟아진다.
KIC는 지난해 50억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당기순손실이 69억원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부를 불리기 위해 탄생한 국부펀드가 계속 나랏돈만 까먹고 있는 셈이다.
8월 말 현재 투자액이 110억달러에 이르는 등 투자 규모를 조금씩 늘려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안전 자산 위주의 소극적 투자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은행권 고위 관계자는 "KIC를 어떻게 운용할지 관계 당국간 공감대조차 형성돼 있지 않다"며 "출범 2년 만에 성과를 기대하기는 무리이지만, '사공이 많은 배'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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