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에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정치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집만 그런가 싶어서 몇몇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대개 마찬가지였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유난했던 우리 국민들이 한날 한시에 약속이나 한 듯 홀연히 도를 깨우쳤을 리는 없을 터이고, 더군다나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만저만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맞겨룰 만한 범여권 후보의 윤곽이 흐릿한 때문이다. 범여권 쪽에서야 아직 판이 펼쳐지지 않았으니 국민의 정치열기가 미적지근한 것이라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설사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 경선이 끝나더라도 근본적 상황 변화를 점치기 어렵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나 손학규 전 경기지사, 이해찬 전 총리 등 경선후보 3인의 지지율이 여전히 한자릿수에서 도토리 키 재기를 거듭하는 마당이다.
아무리 정치가 살아서 꿈틀대는 '생물'이고, 선거가 예측이 어려운 게임이고, 인심의 변화가 총알보다 빠르다 해도 지지율이 갑자기 서너 배로 뛰어오를 가능성은 희박하다.
반면 한나라당 이 후보가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 후보 누구도 넘지 못한 지지율 50%의 벽을 가볍게 넘어서 있다. 전에 보지 못한 특이한 모양새여서 싱겁기 짝이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 싱겁게 흘러가는 대선 판세
이런 현상을 뒤흔들 극적인 변수도 꼽을 만한 게 없다. 2002년 '노무현 돌풍'의 출발점이 됐던 '경선 흥행'의 재현은 이미 절반쯤 물 건너 간 상태다.
범여권은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후보경선이 끝나고,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과 같은 독자후보까지 아우르는 '후보 단일화' 효과에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 또한 희망적이지 않다.
'후보 단일화'의 현실적 효과는 파괴력 있는 후보끼리의 통합이나 연대에 의해서나 가능한데, 현재의 통합신당이나 민주당 경선후보, 문 전 사장 등 어느 누구도 파괴력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고만고만한 후보들끼리의 단일화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한국일보(28일자 5면)가 올 대선 분위기를 2002년 대선과 비교해 민족주의ㆍ인터넷ㆍ제3후보 등이 불러 일으키는 세 가지 바람을 찾아볼 수 없는 '3무 선거'라고 진단했듯, 태풍이나 돌풍은커녕 잔잔한 바람조차 일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범여권이 기댈 만한 것은 2차 남북정상회담 정도가 고작이다. 현재 통합신당 후보경선에서 정 전 의장과 이 전 총리가 서로 정상회담 성사의 발판을 놓았다고 다투어 내세우는 모습에서 그런 내심의 기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사적 방북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식어있다.
일찌감치 대선에 미칠 정치적 영향력이 지적되면서 국민의 마음에 빗장이 걸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감동을 부를 만한 요소가 빠졌다. 남북 정상의 두 번째 만남이 첫 만남과 같은 역사적 상징성을 가질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국민적 흥분과 열기는 무망하다. 첫 정상회담의 빛과 그늘을 살핀 바 있는 국민은 단순한 상징성이나 상호협력 제스처보다는 돈으로라도 평화와 인도주의를 사는 구체적 성과를 바란다.
그런데도 흘러나온 내용은 비무장지대(DMZ) 도보 통과나 <아리랑 축전> 참관 등 상징행위뿐이다. 신의주특구 공동개발 등도 선언적 의미에 치중해 있다. 아리랑>
● 감동이 없는 남북 정상회담
이산가족 면회소를 외딴 금강산이 아니라 판문점에 두거나, 남북 이산가족의 상호 방문 실현과 연계해 경제지원을 하거나, 휴전선 일대에 집중 배치된 군대를 후방으로 이동하기로 하는 등의 구체적 조치가 훨씬 더 국민의 마음에 와 닿을 터이지만, 그저 막연한 평화와 화해를 확인하고 과시하는 데 머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상징성과 흥분과 실질적 성과가 없는 '3무 정상회담'에 감동이 따를 수 없다. 3무 선거와 마찬가지로 싱겁고 허전할 뿐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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