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모(32)씨는 22일 오후 서울 광진경찰서 상황실을 찾아 눈물로 호소했다. “여동생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피가 없어 죽게 생겼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추락사고를 당해 당장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수혈용 혈액(O형)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경찰서 의경들의 헌혈로 위험한 고비는 일단 넘기고 27일 오후 가까스로 수술을 마쳤다.
#2. 직장인 최모(34)씨는 얼마 전 퇴근 후 서울의 한 헌혈의 집을 찾았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평소 오후8시까지 운영하던 헌혈의 집이 대한적십자사 노조의 준법투쟁으로 오후6시 이후에는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최씨는 “(헌혈하겠다고)일부러 찾아온 사람도 그냥 돌아갈 판인데 누가 오겠냐”며 “갈수록 심해지는 헌혈기피 현상은 적십자사 노사 양측 모두의 책임 아니냐”고 쏘아 붙였다.
혈액 수급에 온통 비상이 걸렸다. ‘피 가뭄’이란 말이 공공연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방학이나 휴가 등 여름철에 학생과 회사원 등의 헌혈 기피가 확산되면서 혈액 확보가 절대적으로 힘든데다, 올해의 경우 벌써 한 달을 넘긴 적십자사 노조의 준법 투쟁까지 겹쳐 전국 97곳의 ‘헌혈의 집’이 파행 운영되고 있다. 혈액 확보 및 관리가 모두 엉망인 셈이다.
혈액 부족 실태
27일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등에 따르면 혈액 재고량은 검사가 끝나지 않은 혈액을 포함해도 적혈구 농축액이 2.5일분, 혈소판 농축액이 1.4일 분에 불과하다. 혈액적정 보유량은 적혈구 농축액이 7일, 혈소판 농축액이 3일이다.
특히 O형과 A형 피의 재고량은 각각 1,888개(개당 400cc들이 기준), 2,220개로 각각 1.5일 분, 1.4일 분에 그치고 있다. AB형 재고량은 1,169개(2.2일 분), 그나마 B형이 6,456개를 기록, 5.2일 분으로 다소 여유가 있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보통 여름철이 혈액이 가장 부족한 시기인데, 최근 몇 년 전부터 헌혈기피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며 “노조의 준법투쟁으로 적극적인 헌혈 유치 노력도 사실상 어렵게 돼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혈액수급 차질 빚게한 노사 줄다리기
적십자사 노조는 임금인상 및 노조원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난달 25일부터 준법투쟁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전국 97곳의 헌혈의 집은 평일 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 주말에는 대부분 문을 닫고 있다. 지난 주말인 22일과 23일에도 고작 25~30곳만이 문을 열었을 뿐이다.
최근 임금동결로 접점을 찾아가던 노사 양측은 그러나 사측이 보건 간호직 신규채용자에 한해 6급에서 7급으로 낮추겠다는 방안을 제시하자 다시 갈등을 빚고 있다.
박충건(46) 전국보건의료산업조합 적십자사본부지부 사무국장은 “보건간호직 등급을 낮추겠다는 사측의 요구를 절대 받아 들일 수 없다”며 “준법 투쟁으로 인해 혈액 수급에 차질이 있다는 점은 통감하지만, 사측도 성실히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측은 “직원 채용은 사측의 고유권한”이라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확산되는 환자 피해
혈액 부족 현상이 현실화 하자 환자와 가족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참다못한 백혈병환우회는 적십자사 노조를 향해 “혈액골수관리사업에서 당장 손을 떼라”며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백혈병환우회 최원식(37) 헌혈팀장은 “지난해 준법투쟁 이후 적십자사 노조가 환자의 불편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은 사전에 환자단체와 협의 하기로 했으나, 올해에도 이를 어겼다”며 “노조의 잦은 파업과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적십자사측의 안이한 대응 모두 환자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이라고 성토했다.
헌혈 동참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다. 명동 헌혈의 집 류형선 간호사는 “현장에서 일 하는 사람으로서 매일 땀나게 일 해도 피가 늘 모자라 안타깝다”며 “국민들이 헌혈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동참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재훈(22)씨는 “누구나 수혈을 받을 상황에 처할 수 있다”며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 헌혈이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다. 복지부 관계자는 “준법투쟁을 한다지만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혈액 재고량이 크게 부족하다”며 “국민 생명과 직결된 혈액을 담보로 투쟁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진실희인턴기자(서강대 신문방송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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