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끝났다. 모두들 조금씩 늘어진 몸과 마음을 추슬러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다. 월요병에 익숙한 직장인들의 제자리 찾기야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주위의 얘기로는 ‘명절 증후군’에 시달렸을 며느리들이나 그 모습에 간을 졸였을 남편들의 제자리 찾기가 더 큰 문제인 듯하다. 한동안 ‘명절 증후군’은 익숙지 않은 노동이 주된 요인처럼 여겨졌다.
쪼그리고 앉아 갖가지 부침개를 지지고, 차례 음식을 장만하는 한편으로 모여든 가족들의 끼니를 꼬박꼬박 챙기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일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더욱이 남자들이 손끝 까딱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술상이나 고스톱 판을 벌여놓고는 끊임없이 이런 저런 주문을 늘어놓는다. 음식이 옛날 같지 않다느니, 짜니 싱겁니 하는 핀잔까지 곁들여지면 며느리들의 참을성은 한계에 이르게 마련이다. 이 지경이 되면 단순한 노동의 고통에, 가족 내의 불평등에 대한 심리적 불만이 덧붙여진다.
다행히 명절 때 일을 거드는 남자들이 늘고 있고, 유림까지도 남자들의 적극적 동참을 권장하고 나선 만큼 앞으로 체면 때문에라도 머뭇거릴 남자들은 줄어들 모양이다.
■그러나 일 부담이 준다고, 명절 증후군이 사라지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워낙 복잡한 심리적 요인이 얽혀 있어서, 흔히 거론되는 ‘노동의 고통’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의 무게가 심리 상태에 따라 달라질 뿐만 아니라 무게에 견디는 힘까지도 달라진다.
집안 대소사는 물론이고, 동네 잔치나 초상 때마다 무한 노동을 제공했던 어머니 세대 농촌 주부들의 모습이 좋은 예다. 일상적 중노동의 현실 때문에 명절 노동이 별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도리 의식’이 강했다.
■은근한 보상도 따랐다. 늘 일에 시달리면서도 아이들에게 보리밥조차 배불리 먹일 수 없던 처지에서 명절 노동은 아이들 입에 들어갈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장만한다는 별난 의미가 있었다. 결핍의 시절이 가고, 이제 아이들은 먹을 것에 관심이 없다. 가족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먹이를 얻고 나누는 기초적 먹이단위이기도 하다.
집을 나가도 굶어 죽을 일이 없는 세상에서 먹이를 매개로 한 동물적 모성의 설 자리는 그나마 유아기에 국한된다. 기초적 먹이 단위인 핵가족 내의 연줄이 이렇게 흔들리는 마당에 대가족 단위의 연줄을 위한 명절의 의미가 온전할 리 없다. 부른 배가 인연의 줄을 끊는 포복절연(飽腹絶緣)의 시대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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