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현란한 입담의 장편 <고래> 를 내놓으며 한국 소설에 이야기성이란 ‘오래된 미래’를 제시했다는 찬사를 받았던 천명관(43)씨가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문학동네 발행)를 펴냈다.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당선작이자 등단작인 <프랭크와 나> 를 필두로 올해 계간지 여름호에 게재한 작품까지 총 11편의 단편을 묶었다. 프랭크와> 유쾌한> 고래>
이 중 절반 가량인 5편이 올해 집중적으로 쓰여진 점에 대해 천씨는 “<고래> 출간 이후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 집필에 매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래>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무한확장하던 <고래> 에 비한다면 천씨의 단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레이먼드 카버 등 영미권 작가의 단편에서 감지되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에 맞닿아 있다. 일방향으로 단출하고도 힘있게 뻗어나가던 이야기는 불쑥 끼어든 사건과 충돌하면서 기묘한 정서를 유발한다. 고래>
표제작, 등단작을 비롯한 몇몇 작품을 장식하는, 사실상 국적이 무의미한 이국의 인물과 배경은 이 늦깎이 작가의 첫 창작집에 독특한 아우라를 더한다. 천씨는 “장편과 다르게, 단편은 가벼운 리듬으로 작품을 툭툭 던진다는 느낌으로 쓴다”고 말했다.
표제작은 남편과 여동생 간 불륜을 비관한 요한나의 음독 자살 기도를 둘러싼 소동이다. 정작 독이 든 와인을 마시고 쓰러지는 것은 남편. 영문을 몰라하는 요한나에게 수다쟁이 하녀 마리사가 쏘아붙인다. “코르크 마개를 딴 채 와인을 밖에 그냥 놔두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마개를 다시 잘 막아서 냉장고에 있던 것과 바꿔놓긴 했지만 말예요.”(69쪽) 천씨는 단막극 풍의 이 유쾌한 단편을 도입부로 삼은 희곡도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
‘시네마 키드’인 작가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대한 헌사를 부제로 붙인 <더 멋진 인생을 위해> 는 젊은 타짜꾼을 두목에게 인계하는 임무를 맡은 중년 갱스터의 회한을 그렸다. 첫사랑과 함께 발가벗고 트램펄린을 즐기던 일을 추억하는 퇴락한 폭력배의 “울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있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238쪽)진 얼굴과 마주할 때 작품을 읽는 내내 빼물었던 웃음은 어느덧 아득한 비애로 환치된다. 더>
신도시에서 예닐곱 살 딸을 둔 젊은 부부 ‘대서’와 ‘숙영’이 등장하는 두 편의 단편 <세일링> <농장의 일요일> 은 좀 더 실감나는 페이소스를 전한다. 꽉 막힌 추석 성묘길 자가용 안에서 숙영의 느닷없는 이혼 요구를 받은 <세일링> 의 대서가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딱딱하고 날카로워지고 있다”(98쪽)는 비감에 젖어들 즈음 큰 범선이 그의 차 앞을 가로질러 간다. 세일링> 농장의> 세일링>
배꼬리를 따라가는 환상의 서행(徐行)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메마른 정서를 물큰히 적신다. 천씨는 “대서-숙영 부부는 나와 동년배이자 위태롭고 불안한 현대인의 표상”이라며 “이 부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련의 연작을 구상했었다”고 말했다.
성공한 50대 방송작가의 기억 문제를 다루며 삶을 지탱하는 것들의 허약함을 형상화한 <비행기> , 생의 전망이 가려져 있던 20대 초반 시절의 충동과 불안을 따뜻하게 그린 자전적 소설 <이십세> 등도 읽는 재미와 여운을 함께 안겨주는 작품이다. 천씨는 “문단 일각에선 내 단편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하기도 하지만, 소위 본격 문학이란 이름으로 획일화된 단편을 양산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문제”며 “지금까지 그랬듯 개의치 않고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십세> 비행기>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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