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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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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입력
2007.09.2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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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현란한 입담의 장편 <고래> 를 내놓으며 한국 소설에 이야기성이란 ‘오래된 미래’를 제시했다는 찬사를 받았던 천명관(43)씨가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문학동네 발행)를 펴냈다.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당선작이자 등단작인 <프랭크와 나> 를 필두로 올해 계간지 여름호에 게재한 작품까지 총 11편의 단편을 묶었다.

이 중 절반 가량인 5편이 올해 집중적으로 쓰여진 점에 대해 천씨는 “<고래> 출간 이후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 집필에 매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무한확장하던 <고래> 에 비한다면 천씨의 단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레이먼드 카버 등 영미권 작가의 단편에서 감지되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에 맞닿아 있다. 일방향으로 단출하고도 힘있게 뻗어나가던 이야기는 불쑥 끼어든 사건과 충돌하면서 기묘한 정서를 유발한다.

표제작, 등단작을 비롯한 몇몇 작품을 장식하는, 사실상 국적이 무의미한 이국의 인물과 배경은 이 늦깎이 작가의 첫 창작집에 독특한 아우라를 더한다. 천씨는 “장편과 다르게, 단편은 가벼운 리듬으로 작품을 툭툭 던진다는 느낌으로 쓴다”고 말했다.

표제작은 남편과 여동생 간 불륜을 비관한 요한나의 음독 자살 기도를 둘러싼 소동이다. 정작 독이 든 와인을 마시고 쓰러지는 것은 남편. 영문을 몰라하는 요한나에게 수다쟁이 하녀 마리사가 쏘아붙인다. “코르크 마개를 딴 채 와인을 밖에 그냥 놔두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마개를 다시 잘 막아서 냉장고에 있던 것과 바꿔놓긴 했지만 말예요.”(69쪽) 천씨는 단막극 풍의 이 유쾌한 단편을 도입부로 삼은 희곡도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

‘시네마 키드’인 작가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대한 헌사를 부제로 붙인 <더 멋진 인생을 위해> 는 젊은 타짜꾼을 두목에게 인계하는 임무를 맡은 중년 갱스터의 회한을 그렸다. 첫사랑과 함께 발가벗고 트램펄린을 즐기던 일을 추억하는 퇴락한 폭력배의 “울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있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238쪽)진 얼굴과 마주할 때 작품을 읽는 내내 빼물었던 웃음은 어느덧 아득한 비애로 환치된다.

신도시에서 예닐곱 살 딸을 둔 젊은 부부 ‘대서’와 ‘숙영’이 등장하는 두 편의 단편 <세일링> <농장의 일요일> 은 좀 더 실감나는 페이소스를 전한다. 꽉 막힌 추석 성묘길 자가용 안에서 숙영의 느닷없는 이혼 요구를 받은 <세일링> 의 대서가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딱딱하고 날카로워지고 있다”(98쪽)는 비감에 젖어들 즈음 큰 범선이 그의 차 앞을 가로질러 간다.

배꼬리를 따라가는 환상의 서행(徐行)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메마른 정서를 물큰히 적신다. 천씨는 “대서-숙영 부부는 나와 동년배이자 위태롭고 불안한 현대인의 표상”이라며 “이 부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련의 연작을 구상했었다”고 말했다.

성공한 50대 방송작가의 기억 문제를 다루며 삶을 지탱하는 것들의 허약함을 형상화한 <비행기> , 생의 전망이 가려져 있던 20대 초반 시절의 충동과 불안을 따뜻하게 그린 자전적 소설 <이십세> 등도 읽는 재미와 여운을 함께 안겨주는 작품이다. 천씨는 “문단 일각에선 내 단편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하기도 하지만, 소위 본격 문학이란 이름으로 획일화된 단편을 양산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문제”며 “지금까지 그랬듯 개의치 않고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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