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재취업 한 지가 벌써 1년이네요. 실업자로 지낼 땐 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몰라요.”
전재필(43)씨는 지난해 9월 교보생명 법인사업본부 팀장으로 재취업했다. 2001년 3월 중견 보험업체에서 구조조정을 당해 실업자가 된 지 5년 만에 얻은 새 일자리다. 2001년 당시 구조조정 칼바람에 희망퇴직원을 낼 때만 해도 “다시는 보험 쪽을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던 전씨. 그러나 지금 그의 서류 가방은 보험 계약서 뭉치로 배가 볼룩하다.
그는 “‘이것만은 절대 안돼’라는 식의 고집을 계속 부렸다면 아직도 하루가 1년 같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며 “눈높이를 낮추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진 구직자만이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초 서울 여의도에 있는 노사공동재취업지원센터에 등록하면서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부동산 사업 등 여러 가지 일에 손댔지만 여의치 않아 재취업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씨는 “적극적인 마음 자세가 백수 탈출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실업자 시절 그는 일찍 일어나봐야 딱히 할 일이 없었지만 아침 6시면 반드시 기상했다. 구직 관련 세미나 등을 찾아가거나 취업 박람회에 가는 등 끊임없이 할 일을 만들었다. 운동도 꾸준히 했다. 그는 “백수 때 게으른 생활이 몸에 배면 소극적이고 자신감도 없어지게 된다”며 규칙적인 생활을 강조했다.
그의 적극성은 재취업지원센터에 함께 있던 실업자들에게 용돈도 벌게 해줬다. 지난해 여름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한 대학원생이 재취업지원센터를 찾아 “실업 관련 논문을 쓰는 데 필요한 실업자 면접 조사에 응할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2시간 면접에 5만원을 준다고 했지만 실업자들은 “노는 게 자랑이냐”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 때 전씨가 나섰다. 전씨는 “실업이 인생의 실패는 아니다. 실업도 즐겨야 좋은 일도 생긴다”며 동료들을 설득해 20명이 논문 면접에 참여하게 했다. 면접 수당 중 일부는 곧바로 회식 비용이 됐고 그날 밤 여의도는 ‘늙은 백수’들의 희망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는 전 직장에서 2001년 구조조정을 당하기 전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전 직원을 상대로 1년에 한 명에게만 주는 모범 사원상을 1990년 입사 이후 두 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외환위기 여파로 어려움을 겪던 회사는 9명의 팀원을 이끌던 그에게 “3명을 골라 내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팀원을 내보내고 살아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희망퇴직원을 쓰고 회사를 나왔다.
월급 통장 없이 살아가는 세상은 힘들었다. 친구와 함께 시작한 부동산 사업은 잠깐 잘 되나 싶더니 정부의 부동산 대책으로 된서리를 맞아 2005년 여름에 접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속옷 원피스 등을 직접 떼다가 좌판도 깔아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내가 옷 가게를 운영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지만 중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의 학원비 대기에도 벅찼다.
그는 “실직했다고 주눅들지 말고 일 없이 놀 때는 설거지라도 하면서 몸을 바삐 움직이라”며 “제2인생의 문은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열린다”고 말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사진=최중욱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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