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업체에서 일하는 A(35)씨는 요즘 회사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기가 겁난다. 회사가 직원들의 인터넷 사이트 방문 기록과 시간을 수시로 확인해 인사 고과에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회사는 IT업체의 특성상 인터넷 모든 사이트의 접속을 허용하고 있다”며 “하지만 항상 감시 받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업무와 관련되지 않는 한 회사에선 점심 때도 인터넷을 안 한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주식 확인 등 사적인 인터넷을 하기 위해 개인용 휴대단말기(PDA)를 갖고 다닌다.
회사의 ‘디지털 감시’에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회사 정보의 보안 관리 차원에서 은밀히 이뤄지던 이메일ㆍ메신저 등 인터넷 검열은 이제 인사 평가의 중요한 항목이 됐다. 최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도입이 확산되는 전사적자원관리(Enterprise Resource PlanningㆍERP) 시스템은 디지털 감시 논란에 휩싸이면서 노사 갈등의 새 쟁점이 됐다.
기업의 콜 센터 상담원들은 디지털 감시에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 전화 상담 부스 안에서 이뤄지는 고객과의 모든 대화가 녹취ㆍ감청 돼 인사 평가 자료로 활용되는 탓이다.
B(36ㆍ여)씨는 금융업체의 콜 센터에서 6개월 동안 일한 뒤 그만 뒀다. 매일 반복되는 회사의 통화 모니터링을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낸 것이다. 그는 “내 모든 행동을 회사가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고객이 무리한 요구나 항의를 해도 결코 화를 못 냈다”며 “퇴근 해 집에 와서도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디지털 감시는 회사의 구조조정 때 ‘위력’을 발휘한다. 인력 감축을 위한 평가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와 합병을 앞둔 전자업체에 다니는 C(34)씨는 “회사가 구조조정 데이터로 쓰기 위해 일부 직원들의 인터넷 사용 기록을 분석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다”며 “업무 시간에 다른 일을 한 건 잘못이지만,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고 씁쓸해 했다.
ERP는 기업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업무 성과 등 모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계량화 해 전산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선진경영 기법”이라며 선호하는 사측과 달리, 노조는 “노동자의 근무 강도를 높이는 전자 감시ㆍ통제 시스템”이라며 반발한다. 한국철도공사 등 주로 공기업 노조들로 구성된 공공운수연맹은 최근 토론회를 열어 ERP가 노동자의 감시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공동 대응하기 위해 ERP 대책팀을 꾸리기로 했다.
ERP로 첨예한 노사 대립을 겪는 곳은 철도공사다. 철도공사는 1월 ERP를 도입했다. 그러나 노조가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1초 1분 단위로 감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며 ERP를 거부하면서 겉돌고 있다. 노조는 최근 사측이 직원들을 상대로 열려던 ERP 교육도 무산시켰다. 10월 파업을 앞둔 노조의 주요 요구 사항 중 하나는 ERP 철회다.
철도노조의 홍영희 전기국장은 “수치화 할 수 없는 업무가 있는데도 사측은 무조건 모든 업무를 계량화 해 전산 등록하도록 강요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철도공사 측은 “ERP는 업무 효율성과 원가 절감을 위한 것이지 직원 감시용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ERP의 일종으로 민원 담당 직원들의 업무 성과를 매일 순위로 매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경쟁 체제를 도입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다. 공단은 그러나 직원들의 순위를 매일 매기지 않고 있다. “효율성을 핑계로 직원들을 매일 감시하려 한다”는 노조의 반발을 감안한 것이다. 공단은 대신 한 달에 한번씩 등 일정 기간을 정해 권역별로 등급을 매겨 실적 평가를 한다.
전문가들은 “어떤 것이 근무 감시이고 근무 관리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지극히 모호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직원들의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회사의 시스템을 무조건 “감시의 의도가 있다”며 백안시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직원들의 근무 태도를 관리하는 것은 회사의 고유한 권리”라며 “그러나 도를 넘어선 통제나 감시는 오히려 직원들의 스트레스만 높여 업무 능률 저하와 무사 안일주의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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