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라산 윗세오름에 11호 태풍 '나리'의 영향으로 하루 563㎜의 비가 내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인가. 그곳 한 골프장과 비교하면 어떨까. 골프장이 100만㎡인데 그 곳에 순식간에 50여만 톤의 물이 쏟아진 셈이다. 100명 정도가 사는 산기슭 마을을 상상하면 더 쉽겠다.
물 50여만 톤? 장마 때 소양강댐에서 50m의 물보라를 일으키며 방류되는 양이 초당 7,000~8,000톤임을 감안하면, 골프장 하나가, 한 동네가 소양강댐 밑에서 10분 넘게 방치돼 물폭탄을 맞은 상황과 같다고 여기면 될 듯하다.
■ 자랄 때 부산 국제시장 화재를 많이 보았다. 설날을 전후해 자주 발생했는데, 그 불이 얼마나 컸던지 시내 전체가 훈훈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 때마다 "불이 나면 그래도 건질 것이라도 있지, 물이 들면 더 무섭다"고 했다. 화재 다음날 어머니와 불 꺼진 시장터에서 타다 남은 비누와 치약, 봉지사탕 등을 떨이로 사온 기억도 있다.
1959년 태풍 '사라' 때 고향에서 교실의 지붕이 날아가고 커다란 돼지가 개천을 따라 흘러가던 모습은 생생한데, 무엇하나 건진 기억은 없다. 물은 빈틈없이, 속속들이 해코지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옳았다.
■ 북반구 우리나라의 경우 6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여름장마를 겪는다. 하지만 장마가 끝났다는데 장마가 오니, 허를 찔린 그 피해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가을장마는 우리의 숙명이 돼가는가. 여름 내 한반도를 지배하던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가 버리면 청명한 하늘을 맞는다.
중국 둥베이(東北)까지 올라갔던 장마전선이 약해져 남하하며 남았던 물기를 소진하면, 그것이 가을장마다. 겨울에 활약할 북대서양 고기압이 장마전선을 아래로 밀어내는 시기인데, 하필 이 때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우리쪽으로 북상하게 된다.
■ 가을장마도, 9월 태풍도 그렇지만 이 둘이 한반도에서 합쳐지는 것이 큰 불행이다. 기상청 통계로 '가을장마+태풍'은 연간 0.8개에 불과하다지만 우리의 기억은 너무나 참혹하다.
59년의 '사라'와 87년의 '셀마'는 천재지변으로 치부하더라도, 최근에 있었던 2002년의 '루사', 2003년의 '매미', 2005년의 '나비' 등은 예보하고 대비한 와중에 몰아쳐 더 아픈 상처를 안겼다.
오늘과 내일 12호 태풍 '위파'가 한반도 중부까지 습격한다고 한다. 불보다 무서운 게 물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민관이 모두 조심하고 대비해야겠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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