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어머니, 루시.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화석 속 그녀는 최초의 직립원인이자 가장 오래된 인류의 증거로 고고학계를 열광시켰다. 후대의 새로운 발굴로 이젠 더 이상 최초의 인간이 아니지만,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에게 그녀는 여전한 상상력의 젖줄이다.
웅숭깊은 시선으로 시간과 존재를 탐색하는 재일 설치작가 최재은(54)이 14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21일부터 11월18일까지 서울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최재은: 루시의 시간’.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가로지르며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철학적 성찰을 계속해온 그는 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일본관 대표작가로 선정될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인정 받고 있지만, 국내에선 성철 스님의 사리탑인 ‘선의 공간’(1998) 같은 조형작품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소개돼 왔다.
루시 화석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측정할 수도, 감촉할 수도 없는 시간을 형상으로 보여준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라 명명한 일련의 작업들이 대표적. 수작업으로 제작된 일본 화지(和紙)를 방부 처리한 후 한국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케냐 등 7개국 11개 지역의 땅 속에 묻는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종이들을 꺼내면 거기엔 각기 다른 토양과 미생물의 특성이 오롯이 응축돼 있다. 썩고 부패한 종이가 품고 있는 미니멀리즘의 추상화 같은 무늬들은 자연의 힘으로 채색된 시간의 흔적이다.
호박 보석 안에 갇혀 있는 벌레들이 우주에 떠 있는 별처럼 아득한 시간을 느끼게 하는 ‘별을 바라보다’, 현미경으로 관찰, 촬영한 미생물의 일생이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순환’, 텅 빈 공간에 뿌려놓은 하얀 운모가루의 반짝임과 시계 초침소리가 무한을 향해 뻗어나가는 숭고한 시간의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자신’ 등도 사유하는 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 ‘루시’는 루시가 여성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증거였던 그녀의 골반뼈로 형상화됐다. 인체의 기본을 이루는 세포 형상이 맞물리면서 이루는 거대한 하트 모양의 골반은 한백옥이라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소재를 통해 생명의 경이와 무한한 시간성을 함축한다. 갤러리를 한바퀴 돌고 나면 300만년의 시간여행을 마치고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박선영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