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영화제의 단연 압권은 로우 예 감독의 <여름궁전> 이다. 나는 가끔 아주 좋은 영화를 만나면, 모든 것을 작파하고 선술집 한구석에서 소주를 마시는 버릇이 있다. 그 해에는 <여름궁전> 이 그렇게 만들었다. 여름궁전> 여름궁전>
물론 청춘이란 여름 한때와 정치적 격변을 함께 그려내는 영화는 영화사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베루톨루치의 <몽상가들> 만해도 유럽 68혁명의 와중에서 뜨거운 피로 영화의 제단에 몸을 의탁했던 영화광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69>는 일본의 전공투 세대를 위무한다. 그런데 <여름궁전> 은 뭔가 좀 달랐다. 여름궁전> 몽상가들>
이 영화는 많은 청춘과 정치적 격변을 다룬 영화들의 회고조어린 한탄이나 그때 그 시절을 미화하는 퇴행적 탐미주의가 없었다. 그저 육체 자체에서 젊음의 각을 세우고, 그 에너지로 정치적 한계를 넘어 무조건 저지르는, 질풍노도하는 젊음의 에너지와 혁명의 열기가 록 팝 가요 등등에 고스란히 실린다.
<여름궁전> 이 더욱 푸르게 좋았던 것은 그 후 1시간 이상 이어지는 10년간의 에필로그 였다. 주인공인 조선족 아가씨 홍은 베이징대학에 입학해 전도유망하고 잘 생긴 저우웨이에 빠져들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억의 문신을 남긴 채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다. 저우웨이는 전체주의 사회를 피해 베를린까지 망명을 했지만, 홍의 여자친구이자 애인이었던 리티의 죽음을 목격할 뿐이다. 여름궁전>
그 지리멸렬함이라니. 홍의 방황, 홍의 상처, 홍의 기억은 모두 천안문사태를 거친 '젊은 그들'의 상처와 방황과 기억의 내면에 다름 아니다. 베를린으로 가는 저우웨이의 행로 역시 베를린 장벽이후 신자유주의 질서에 몸을 맡겼던 중국 현대사의 고된 여정을 착실히 순례한다.
홍과 저우웨이는 천신만고, 우여곡절 끝에 만나지만 저우웨이는 맥주를 사러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10년만의 만남을 피한다. 홍의 상처투성이인 남성편력은 모두 저우웨이와의 상처에서 기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역동적인 핸드헬드에 얹어내었던 육체의 축제가 끝나는 지점. 피부가 시간의 양피지가 되어 살아온 세월을 축적시켜도 생의 추는 반복된다. 우리가 진정 무서워해야 할 것은 천안문을 가득 매웠던 총과 칼이 아니라, 그 격변의 순간조차도 지나고나면 사라지는, 기억의 고리 사이에서 매순간 살아내야 하는 시간일 뿐.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인의 상처와 기억을 들쑤신 <여름궁전> 은 중국으로부터 상영금지 당했고, 로우 예 감독은 5년간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이 자체가 중국의 '수준'을 증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여름궁전>
386세대의 '깜도 안 되는' 스캔들만 무수한 오늘의 시간을 마주하며, 다시금 <여름궁전> 이 생각난다. 이제는 돌아와 고작 지리멸렬해진 386들이여! 젖멍울까지 욱신거렸던 <여름궁전> 에 다시 가보라. 아니 여름궁전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지금 이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좋은 시절'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알고 있을까? 여름궁전> 여름궁전>
영화평론가ㆍ대구사이버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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