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마흔을 코앞에 둔 사내들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활극이 벌어진다. 상대는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격투기의 제왕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선수. 그를 향해 거침없이 ‘숏 킥’을 날렸던 이들. 다음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인 티에르 앙리(FC 바르셀로나)와 골 결정력을 겨룬다.
기가 막히는데 이상하게 눈이 간다. 채널을 돌린다. 이번엔 키도 제각각, 미모도 가지각색인 여성 연예인들의 아슬아슬 줄타기가 눈을 붙잡는다. 이들이 보여주는 무모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액션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도전’ 이다.
요즘 TV 예능 프로그램들의 키워드는 단연코 ‘도전’이다. 2년 전 방송을 시작한 MBC의 <무한도전> 을 필두로 KBS <해피선데이> 의 ‘하이파이브’, ‘1박 2일’, SBS <일요일이 좋다> 의 ‘옛날TV’ 등 웬만한 인기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엔 하나같이 감초처럼 출연자들의 도전 스토리가 붙어있다. 일요일이> 해피선데이> 무한도전>
돈 없이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살아내고, 음치에 가까운 목소리를 가다듬어 음반을 내기까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도전행위가 전파를 신나게 타고 있다. 도전 프로그램들은 시청률도 탁월하다.
<무한도전> 은 방송 초기보다 오히려 시청률이 크게 올라 이제는 최고 인기 드라마나 넘보는 시청률 30%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비주류 가수들의 도전기를 보여주는 MBC <쇼바이벌> 은 여타 가요방송보다 높은 7%대의 시청률로 선전하고 있다. 쇼바이벌> 무한도전>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이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기자들의 이름은 방송 이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검색순위 상위를 휩쓸고 철모르는 아이들은 지하철과 달리기 시합(<무한도전> 의 초기 방영 내용)을 벌이기도 한다. 무한도전>
왜일까.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도전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 빠지고 방송국은 어김없이 이들 프로그램을 프라임 타임(가족단위 시청자가 많이 모이는 시간)에 배치할까. 한국식 도전 프로그램의 열풍에 담긴 의미를 시시콜콜 따져보자.
■ ‘못생긴 그들’의 도전이 즐겁다
지난 7월 인터넷 UCC게시판에 오른 한 뻐드렁니 영국인의 열창 동영상이 한국 네티즌들의 가슴을 후볐다. 평범하다 못해 평균 이하의 외모, 여러 번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을 뻔했던 스토리, 휴대폰 외판원으로 생활하며 ‘단 한 번 찾아온 기회’(One Chanceㆍ그의 첫 앨범 제목이다)를 잡아 오페라 가수로 승천한 폴 포츠의 모습은 클래식에 냉정했던 한국인마저 너도나도 그의 음반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폴 포츠 성공의 이면엔 도전 프로그램(일반인의 도전이든, 연예인의 그것이든)의 인기공식이 숨어있다. 폴 포츠는 일반인들이 노래 실력을 겨뤄 한 명의 스타로 탄생하는 도전 과정을 보여주는 미국의 인기 리얼리티 TV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 의 영국식 버전인 <브리튼즈 갓 탤런트> 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났다. 만일 폴 포츠가 잘 생긴 외모였고 평탄한 인생역정을 걸어왔어도 그의 성공, 특히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이 가능했을까? 브리튼즈> 아메리칸>
<무한도전> 의 캐릭터들을 보자. 당사자들도 방송에서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들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잘 나가는 연예인이고 어쩌다 지하철이라도 탈라치면 사인공세로 한 발짝 내딛기가 힘든 ‘대한민국 1%’이지만 극 중에서 눈에 들기 위해 국수 50그릇을 먹어치우고, ‘마법의 구두’(깔창이 가득 깔린 키 높이 구두)에 의존해 모델로 데뷔, 런웨이를 걸어 보이는 그들. 눈물겹지는 않지만 어쩐지 못나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끌렸다. 무한도전>
<무한도전> 의 연출자인 MBC 김태호 PD는 “ <무한도전> 은 일곱 난쟁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컨셉으로 하고 있다. 이들 일곱 난쟁이가 길을 떠나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보통 이하로 묘사되는 남자들의 성장 드라마라고나 할까”라고 말한다. 무한도전> 무한도전>
김영찬 한국외대 언론학부 교수는 <무한도전> 류의 도전 프로그램의 인기비결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도전을 소재로 다룬 프로그램은 역사가 길다. 무한도전>
과거의 <가요 청백전> , <명랑 운동회> 가 현대적으로 변신한 것들이다. 요즘의 도전 프로그램은 평범한 주인공이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과정을 오밀조밀 따라간다. 그러면서 시청자에게 눈물, 때론 웃음을 선사하는 게 이들 프로그램의 방식이다. 명랑> 가요>
시청자의 관심을 모으는 주된 원인은 아무래도 대리 만족일 것이다.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캐릭터들이, 혹은 비주류에 놓인 연예인(MBC의 <쇼바이벌> 에서 1등에 도전하는 마이너 가수들)이 단순한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호감을 갖는다. 그 어떤 가치를 떠나 성과주의가 우선되는 도전 프로그램은 원초적인 매력이 있는 것이다.” 쇼바이벌>
■ ‘없는 사람들’의 분투에 끌려
출연자가 주류가 아니고, 미남미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전 프로그램의 인기가 완전히 풀이되지는 않는다. 시청자가 평범한 캐릭터의 외모만 보고 호락호락 리모컨 버튼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다름 아닌 프로그램의 ‘서민적인 성격’이 해답이다.
시쳇말로 ‘개뿔’도 없는 사람들의 분투로 구성되는 도전 프로그램이어야만 시청자의 관심을 담보할 수 있다.
외국의 인기 있는 리얼리티 쇼들이 ‘될성부를 나무’를 골라내 최고의 제작자가 앨범을 내주거나, 이미 영화의 수재로 증명된 출연자들을 경쟁시켜 메이저 영화사와 계약을 맺어주는 등 엘리트들을 도전주자로 꼽는 것과 달리 우리의 도전 프로그램들은 열악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그야말로 서민을 모델로 한 경우에만 성공을 거뒀다.
‘서민적인 성격’이 결여된 <미려는 괴로워> <비밀스런 현영의 꿈> 은 ‘도전’이 장치로 쓰였음에도 쓴 잔을 여지없이 들이켰다. 비밀스런> 미려는>
예를 들어 <쇼바이벌> 의 출연자들은 대부분 돈이 없어서 앨범을 못 내거나 인디 무대에서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는 등 일종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다. 프로그램은 이들에게 특별한 지원을 해주지 않고 오직 출연자들이 준비한 것만으로 무대에 오르게 한다. 쇼바이벌>
사정이 이러니 잘 차려입은 가수들의 무대와 달리 좀 허술해보이지만 반대로 출연자의 도전이 더욱 열정적으로 비치는 상황이 연출된다. 땀 냄새 나고 서툴지만 진실한 이들의 도전이 시청자에게 어필하는 메커니즘이다.
<옛날 tv> 의 연출을 맡은 SBS 박상혁 PD는 “한국의 시청자는 TV 속 캐릭터가 마치 ‘나와 같다’는 동질감을 느껴야 쉽게 몰입한다. 캐릭터가 여러 일에 도전하면서 실수하고 부딪치면서 차츰 발전하는 모습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옛날>
아무리 허둥대도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는 세상. TV라는 환상의 도구를 들여다보는 시청자들은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를 벗어난 도전 프로그램의 서민적인 분투를 맘에 들어 한다는 분석이다. TV 칼럼니스트 정석희씨는 “답답한 사회 현실에서 내 이웃 같은 사람이 각고의 노력과 도전 끝에 성공하는 것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는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꿈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 “쉽게 접근하는 형식” 비판도
도전 프로그램의 특성상 ‘틀’ 에 박히지 않은 구성도 인기의 한 몫을 한다. 또한 단순한 캐릭터 간의 대립구조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는 평이다.
김형진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팀장은 “마치 한 편의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한 대립관계에서 시청자들이 특별한 흥을 느낀다. 일반인들이 나와 짝짓기에 성공하는 케이블 채널의 <아찔한 소개팅> 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매 한가지이다”고 분석했다. 아찔한>
최영근 MBC 예능국장은 “도전 프로그램은 출연자들도 다음 주 녹화내용이 뭔지 모르고 대본을 받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고정된 틀이 없고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지루하지 않다.
시청자들은 이런 점에 끌린다. 일반인들, 잘나지 않은 연예인들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너무 틀에 박혀 살아왔구나’라는 식의 자기성찰이 자연적으로 이뤄진다. 청소년들에겐 일종의 자신감을 북돋아준다. 오락프로그램이 시청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도전 프로그램의 붐은 문제될 것이 없을까. 아니다. 도전 일색의 프로그램 유행은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고정된 틀만을 양산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영찬 교수는 “방송사 입장에선 이와 같은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사전제작이 필요 없고 쉽게 만들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 선호하고 있다”며 “즉흥적으로 제작되며 수십 주에 걸쳐 만들어지는 외국의 리얼리티쇼와 달리 단기간에 승부가 갈리는 것도 우리의 방송국들이 도전 프로그램 제작을 좋아하는 이유이다”고 설명했다.
김형진 팀장은 “한 개의 프로그램이 성공하니까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 도전 컨셉을 도입하는 것은 따라 하기식 편성일 뿐”이라며 “일반인 도전 프로그램의 경우는 시청자를 직접 무대로 내세워 오락의 객체로 만드는 문제도 있다”고 지적했다.
도전 프로그램의 궁극은 어쩌면 연예인들이 등장한 모습을 간접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데 멈추지 않고 직접 시청자가 주인공으로 나서는 리얼리티쇼가 아닐까. 아쉽게도 전문가들은 시청자들의 눈에 익은 서구적인 리얼리티 쇼들이 우리나라에서 자리잡기는 요원하다고 말한다. 이유는? 놀랍게도 서구인보다 이타적인 한국인의 특성때문이라고.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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