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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36>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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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36>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입력
2007.09.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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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을 좌초시킨 우리 사학의 등대’.

1967년에 출간된 이기백(李基白)의 <국사신론> (1976년 <한국사신론> 으로 개정)은 출간과 동시에 당시 국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책은 일제 어용학자들에 의해 반도성(半島性), 사대성(事大性), 정체성(停滯性) 등으로 폄하돼 온 일그러진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초판본 서문에서 “식민사관은 한국민족이 선천적 혹은 숙명적으로 당파적 민족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민족적 단결을 파괴해 독립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성이 역사적 산물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은 아니다”라며 식민사관을 통렬히 비판했다.

고려대 민현구 교수는 “1960년대 들어 한국사학에 중요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지난날 일제 어용학자들의 그릇된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동시에 한국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발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새로운 방향 제시는 해방 직후에 진출한 신세대 학자들이 주도했으며 그 결과로 얻어진 가장 값진 성과가 바로 <한국사신론> 의 탄생이었다”고 평가한다.

1947년 출간된 이병도의 <국사대관> 이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학계에서 바이블 격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한국사신론> 은, <국사대관> 이 넘지 못한 벽을 일거에 허무는 계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식민지사학을 극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국사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 구체적인 작업은 시대구분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기백은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은 물론 고대 중세 근대라는 서구식 3분법으로는 한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국사의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이었다. 지배세력은 일정한 시기에 정치ㆍ사회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역사를 움직여 나간 역동적인 인간집단을 말하며, 민중의 이익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나 부르주아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게 이기백의 설명이다.

그는 이에 따라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원시공동체 사회 ▦전제왕권의 성립 ▦호족의 시대 ▦문벌귀족의 사회 ▦신흥사대부의 등장 ▦사림세력의 등장 등 16단계로 체계화했다.

지배세력이 씨족국가에서 부족국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를 거치면서 소수 집단에서 벗어나 점차 사회의 중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독창적 발견이었다.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은 <한국사신론> 초판에서는 18단계, 1976년 개정판부터는 16단계로 정리했다.

이기백은 이런 사관에 따라 지배세력의 몰락과 쇠퇴과정보다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력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한국사의 주체적ㆍ역동적 흐름을 읽어냈다.

그는 자신이 이같은 역사적 시각을 갖게 된 것에 대해 “농민운동가였던 선친(이찬갑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일제 하에서 역사와 언어마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선친의 당부를 들어온 그는 오산학교에 진학, 교사로 있던 함석헌의 <성서의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 와 신채호의 <조선사 연구초> 를 읽으면서 뚜렷한 역사관을 갖게 됐다.

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이던 1945년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곧바로 소련군 포로가 된 이기백은 한국인 포로수용소에서 동료들의 권유로 한국사를 강의하며, 신채호과 함석헌 등의 역사관을 토대로 개설서를 썼다. 이 필사본 개설서를 시작으로 그의 오랜 한국사 탐험이 시작된 것이다.

이기백은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1회로 졸업한 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1년 봄 교재용으로 <국사신론> 을 펴낸다. 이 책이 바로 6년 뒤에 발간된 <한국사신론> 의 모체다. <한국사신론> 은 이후 개작을 거듭해 1976년에 개정판, 1990년에 신수판, 그리고 1992년 1월에 신수중판을 펴내면서 현재까지 35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또 1970년 일본어로 처음 번역된 이래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말레이시아어 러시아어 등 6개 국어로 번역 출간돼 외국인들에게 한국사를 이해하는 필독서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기백은 생전에 자신의 역사관을 ‘인간 중심 사관’이라 표현하고 “역사발전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균등한 행복을 주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한국사신론> 은 이런 사관에 바탕해 신채호의 항일사관, 함석헌의 기독교사관, 손진태ㆍ이인영의 신민족주의사관, 그리고 유물사관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수용ㆍ극복하고,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과 함께 하는 새로운 한국사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기백 연보

1924년 평북 정주 출생

41년 오산중학교 졸업

47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56년 서울대 강사

58년 이화여대 교수

63년 서강대 교수

67년 <국사신론> 출간

76년 <국사신론> 개정판 <한국사신론> 출간

85년 한림대 교수

90년 <한국사신론> 재개정판 출간

99년 이화여대 석좌교수

2004년 별세

▲저서

<고려병제사 연구> (1968) <신라사상사 연구> (1986) <고려귀족사회의 형성> (1990) 등 저서와 편ㆍ역서 30여 권, 논문 160여 편

■ 자신에 엄격했던 ‘학같은 선비’… 역사학의 서강학파 일궈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

2004년 6월 2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이기백은 이렇게 말하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명저 <한국사신론> 을 비롯해 <고려병제사 연구> <신라정치사회사 연구> <신라사상사 연구> <고려귀족사회의 형성> 등 신라ㆍ고려사 연구에서 그가 이룩한 혁혁한 연구성과는 이같은 열정의 산물이었다.

이기백의 제자들은 그를 '학(鶴) 같은 선비'로 기억한다. 언제나 묵향이 묻어나올 듯한 하얀 모시적삼을 입은 단아한 모습이 영원한 이기백의 상이다.

그는 작고 직전 병세가 급속히 나빠지자 직계가족 외에는 문병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을 보였다. 40여년을 대학에 몸담았으면서도 연구소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을 맡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는 논문을 쓸 때 애매모호한 말로써 얼버무리면 그것이 "속임수가 될 수 있다"고 늘 경계했다.

제자인 이기동 동국대 교수는 "선생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는 관대했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정두희 서강대 교수는 "대학원 시절 세미나는 제자들이 선생님의 학설을 비판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다"며 "선생님은 당신과 다른 견해라 하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면 다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기백은 1963년 서강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22년간 후학을 양성하면서 전해종(동양사), 길현모 차하순(서양사) 교수와 함께 '서강학파'라는 학맥을 일궜다. 하지만 정작 그는 '학파'니 '인맥'이니 해서 세속적 인연으로 학문하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홍승기 정두희 이종욱(서강대), 이기동(동국대), 김두진(국민대), 김용선(한림대), 김수태(충남대), 신호철(충북대), 김당택(전남대), 노용필(덕성여대), 조인성(경희대) 교수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기백 선생님은 진리와 도덕을 조화시키고 실천하는 선비였다"는 게 이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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