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6월 20일 서울 워커힐 VIP빌라 회의실에서 제3차 예비회담이 열렸다. VIP빌라의 회의장 벽 양쪽에 걸린 화려한 추상화 대작 두 점은 회의장의 격조를 한껏 높여주었다. 그러나 회의장엔 양측 대표단 14명 외엔 아무도 없었다. 종업원은 물론 양측 대표단의 명패도 없었다. 당연히 보안유지 때문이었다.
회의장 밖으로 전망이 보이는 쪽을 중국측에 내주고 우리는 벽을 향해 마주 앉았다. 중국대표단도 1, 2차 회담장소인 베이징의 댜오위타이(釣魚臺) 보다 훨씬 좋은 곳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연극의 무대세팅처럼 회의장 분위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VIP빌라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두 번에 걸친 중국측의 환대에 감사하면서 중국대표단이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을 환영하였다. 장루이지에(張瑞杰)대사는 이번 방문의 목적이 수교문안 채택이라고 밝히고 ‘수교콤뮤니케’와 ‘비망록’ 등 두 문안을 이미 한국에 넘겼고 이날 아침 한국의 문안을 넘겨받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대표단이 밤새워 검토해서 양측 문안을 단일 공동문안으로 만들어 김석우 아주국장이 아침 일찍 이상옥 장관의 승인을 받아 장 대사에게 전한 것이다.
나는 우리측이 정리한 공동문안을 교섭의 토대로 하자고 제의했고 중국측도 선뜻 응했다. 어려운 수교문안 교섭이 의외로 잘 풀린다는 예감이 들었다. 말하자면 아직 준전시상태인 적지에 처음 들어와서 근 한 세기에 걸친 갖가지 장애물을 걷어내고 국교의 대로를 여는 중대한 수교문안을 교섭해야 하는 중국대표단이었다. 그만큼 책임이 무거웠을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외교교섭을 해왔다. 일본과 아시아 각국과의 무역, 어업, 과학기술 회담 등 양자 교섭은 물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담에 정상회담을 추가하고 동북아 6자 대화를 창설하는 다자교섭 등에도 참여해 문장 하나, 단어 하나, 글자 한자로 밤을 새고 협상하던 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이번 수교교섭처럼 중요한 협상은 처음인데도 이처럼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잘 풀려간 협상은 일찍이 없었다.
그만큼 양국대표단은 두 차례에 걸친 예비회담을 통해 신뢰를 쌓은 것이다. 즉 서로 대립해서 내 것을 쟁취한다는 ‘제로섬(zero sum)게임’을 하기보다 동고동락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함께 추구해 간다는 ‘플러스섬게임’을 한다는 신뢰관계가 조성되어가고 있었고 회담 분위기도 부드럽게 무르익고 있었다.
단일 공동문안으로 담판을 시작한 것은 주효했다. 양측이 모두 수교를 조기에 달성하자는 적극적 공동목표를 공유한 것은 서로 논쟁이 아닌 합의를 지향하는 결정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이상옥 장관이 조기수교에 초점을 맞추고 대표단의 입장을 쉽게 풀어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나는 중국측도 비슷한 이유에서 수교문안을 조기에 확정, 수교를 기정사실로 해서 반대파를 설득하자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북한도 설득할 심산이었다.
말하자면 한국과 중국은 ‘같은 배’를 타고 가자고 했고 실제로 어느 시점부터인가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약 100년간 닫혔던 한중 양국의 문을 여는 수교를 단 두 가지 문서로 합의해서 정리하는 문안교섭은 어느 교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었다.
긴 하루였다. 이 역사적인 문서의 제목부터 전문, 문장의 숫자와 의제, 단어의 가감과 교환, 타협과 절충 - 이 과정은 한중 양국과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단이 각기 자국의 국익을 위한 최고의 논리를 개발하고 최선의 지혜와 균형감각을 동원한 소산이다.
바로 6개항으로 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과 비공개 8개항으로 된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간 수교에 관한 양해각서’라는 두 문서이다.
이틀에 걸친 피 말리는 문안교섭을 끝내고 나는 문안작업을 한 사람들이 모두 각자 자기 이름을 문서에 씀으로써 역사의 증인이 되자고 제의했다. 이에 따라 각자 문서에 서명을 했다. 나는 서명한 볼펜을 장 대사의 중국산 볼펜과 교환했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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