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잠시 3년여 전으로 되돌려보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2004년 3월 12일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 등의 위반을 문제 삼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힘으로 밀어붙여 통과시켰다 그러나 우쭐할 틈도 없이 곧바로 엄청난 역풍이 몰아닥쳤다.
"행태가 밉기는 해도 임기를 불과 1년여 보낸 대통령을 끌어내릴 정도의 사안은 아니다"고 여겼던 여론을 무시한 정치세력의 오만이 도마에 올랐던 것이다.
4ㆍ13 17대 총선을 1주일 여 앞둔 시점까지 열린우리당의 기세는 말 그대로 무서웠다. '백년정당'을 만든다며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의석은 42석에 그쳤다. 그런데 각종 여론조사를 근거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3월 말 이미 과반 이상의 의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됐고 4월 초엔 독자 개헌선인 200석도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 즈음 당시 정동영 당의장의 '노인폄하 발언'이 나왔다. 무르익던 유권자들의 경계심리에 기름을 끼얹은 이 발언은 표 흐름을 급속히 반전시켰고, 결국 그는 모든 공직을 사퇴함으로써 사태 악화를 막았다.
● 탄핵총선 과반 의석, 春夢으로
그러고도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얻었고 청와대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당시에도 "노인폄하 발언만 없었더라면…"하는 다소의 아쉬움은 있었으나 여당이 과반의석을 얻었다는 성취감에 취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거꾸로 "만약 그런 소동이 없었다면…"하고 되돌아보면 아득한 느낌마저 든다. 당시 추세로 볼 때 여당이 별 탈없이 초반 분위기를 이어갔으면 적게는 180석, 많게는 200석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이후 전개된 국정과 정치의 지평은 지금과는 현저히 달랐을 것이다.
많은 시나리오가 가능하겠으나, 우선 여권은 행정과 입법의 전 영역에서 슈퍼 파워를 행사하며 사법의 영역에도 큰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권과 반칙과 유착의 구조를 해체'한다는 정권의 대의명분 앞에 헌법에 보장된 3권 분립도 크게 뜻이 흐려졌을 것이다. 행정수도만 해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달리 나왔을지도 모르고, 외교 경제 국방 언론 종교 교육 등 모든 부문에서 기세 등등한 개혁의 깃발과 칼날이 활개쳤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여당 의원도 견고한 거대 여권의 틀을 벗어나는 반란을 꿈꾸기 힘든다. 청와대의 방침에 대든다는 것은 곧 왕따를 자초하는 것이며 자신의 정치생명까지 위협하는 도박이다.
기득권 타파를 무기로 편 가르기에 익숙한 청와대의 정국 리더십은 확고하고, 백년정당의 장기집권 구상은 단일대오 속에 날로 무르익어갔을 것이다. 물론 소수 야당의 반발과 저항이 종종 발목을 잡았겠지만, 연정이나 개헌하자고 손을 내미는 수고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런 꽃놀이패 같은 그림을 놓치고, 자중지란 끝에 마침내 참여정부를 지켜줄 세력과 사람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에 이르렀으니 노 대통령으로선 땅을 칠 일이다.
코미디 같은 탈당과 창당의 결과로 탄생한 소위 범여권 신당엔 남의 집 사람이 들어와 '거들먹거리고', 고위 공직자들의 태도도 예전 같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잣대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돼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떠들며 청와대를 갖가지 정치공작의 진원지로 몰아붙이지 않는가.
● 언론통제로 국면전환 꾀해서야
원망의 화살이 언론을 향하고 언론이 권력화했다고 비난할 법도 하다. 노 대통령은 최근 취재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한 근거로 언론의 무단적 사무실 출입과 무책임한 정책보도를 거론했다.
그러나 사례는 4년여 전 인수위 때의 경험, 그것도 전해 들은 일방적 얘기 수준을 넘지 못했다. 또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얼마 전 퇴임일성으로 언론의 선정성과 무책임성도 언급한 것을 인용하면서, 최근의 정권 주변 의혹을 깜도 안 되는 사안으로 단정하고 국민들이 혀를 찬 국가정보원장의 일탈된 언행을 격려했다.
아직도 탄핵총선의 추억과 아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역연하다. 자신의 완강한 고집과 주변의 무모한 충성이 나라 일을 망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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