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과 1997년 대선 당시에도 D_100일에는 모든 것이 혼돈이었다. 각 당 후보들이 결정된 상태였지만 선두 주자들이 각종 의혹에 치명상을 입어 선거판이 혼전에 휩싸이면서 승자를 예측하기가 불가능했다.
2002년 대선은 9월 10일이 D_100이었다. 당시 지지율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아슬아슬한 선두를 지킨 가운데 정몽준 의원과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뒤를 바짝 추격 중이었다.
후보로 선정된 뒤 5월까지 50%를 넘나들었던 노 후보의 지지율은 이 때 20%까지 급락했다. 대세론의 이 후보도 연초 50%를 넘던 지지율이 아들 병역비리, 가회동 빌라게이트, 며느리 원정출산 의혹 등으로 타격을 입어 30∼35%에 머물렀다. 두 후보의 하락세를 틈타 월드컵 4강신화로 급부상한 정 의원이 7월 출마를 선언, 이 후보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정치권은 의혹 공방으로 밤낮을 보냈다. 5월부터 시작된 김대업의 병풍은 8월에는 초특급 태풍으로 몰아쳤다. 민주당은 잇따라 각종 의혹을 제기하며 이 후보를 코너로 몰아 붙였다. 한나라당은 병풍사건 편파 수사를 비판하며 김정길 법무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내며 맞섰지만 결국 검찰 수사에 대선 주도권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97년은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가 ‘9룡’이 격돌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뒤 지지율이 50%대까지 치솟아 사실상 대세를 굳히는 듯했다. 그러나 이 후보는 7월 임시국회에서 국민회의가 이 후보의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9월 1일자 한국일보 조사에서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경기지사에 이어 3위로 쳐졌다.
이 지사는 이를 빌미로 9월 초 공개적으로 신한국당 후보교체론을 제기했다. 그는 D_101일인 9월 8일 지사직 사퇴 의사를 밝혔고 추석 연휴 시작 직전인 13일 공식 탈당과 독자신당 창당,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국민회의는 김 후보 중심의 안정된 체제를 바탕으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DJP연합 구축과 외연 확대 등 내실 있는 선거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제2 야당인 민주당은 조순 서울시장을 후보로 영입해 놓은 상태였다.
권혁범 기자 hbk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