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700만 명이 넘는 경기도에 고등법원(고법)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수원에 고법을 신설하라.” “항소심 재판을 받기 위해 3~4시간 걸려 서울까지 가야 하는 불편함을 참을 수 없다. 춘천에도 고법을 만들어 달라.”
전국적으로 법원을 신설해 달라는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에 따라 정해진 법원 관할이 도시 팽창과 인구 급증 등을 고려하지 않아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게 주요한 이유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려는 정치권의 이해와 맞물려 이 같은 요구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하지만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는 사법 서비스의 질을 고려할 때 무작정 법원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내 고장에서 재판받고 싶다
국회 법사위에 계류돼 있는 ‘각급 법원의 설치와 관할 구역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모두 7건이다. 이중 경기(수원) 강원(춘천) 경남(창원) 지역을 관할하는 고법을 신설해 달라는 내용이 3건이다. 해당 주민들은 고등법원이 안 되면 지부 형태로라도 2심 법원을 설립해 달라는 주문이다.
실제 전북 지역을 관할하는 광주고법 전주부가 지난해 3월 설립된 데 이어 충북 지역에는 내년 9월 대전고법 청주부가 신설돼 이 지역 주민들은 2심 재판을 위해 멀리 광주나 대전으로 갈 필요가 없게 됐다.
1심 법원 신설 요구는 인구 급증 지역을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천안지법을 신설해 달라며 법률 개정안을 제출한 측에서는 “관할인 충남 천안시와 아산시를 합해 최근 5년간 인구가 15% 증가했고 2010년에는 80만 명에 육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률 개정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검단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인천에서도 인천서부지법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경기 구리시와 남양주시, 용인시, 전남 여수시 등도 마찬가지다. 모 지역구 국회의원은 “최근 마산지법, 안양지법 신설이 잇따라 확정돼 지역 법원 신설은 국회의원의 능력을 평가하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재판받을 권리 대 사법서비스의 질
잇따르는 법원 신설 요구에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는 고민에 빠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정치인과 지역 변호사들의 이해관계가 법원 신설 요구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재판 한번 받으러 몇 시간씩 걸려 대도시 법원으로 가야 하는 불편은 분명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와 상충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을 무작정 늘릴 경우 사법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법원 신설을 요구하는 지역의 인구수와 사건수를 고려할 때 대부분 소규모 법원이 불가피한데 법원을 쪼갤 경우 하나의 재판부가 민사ㆍ형사ㆍ행정 재판을 모두 소화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법원 접근성이 대략 1시간 내외인 수도권 주민들 가운데는 수원고법 신설보다 서울고법 관할을 선호하는 경향도 적지않다”며 “관할 지역의 인구와 사건수는 법원 증설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고 말했다.
예산도 문제다. 7,500억원의 법원행정처 연간 예산 가운데 기본경비(5,500억원)를 제외한 2,000억원이 시설비다. 지법 신설에 200억~300억원이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고법 신설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특히 법원 신설은 검찰청 증설과 맞물려 있어 사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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