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6일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정 회장과 현대차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정 회장이 명예위원장을 맡고 있는 여수 엑스포 유치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판단으로 보인다. 하지만 법원은 재벌의 관행적 비리를 엄담하겠다던 기존 약속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항소심 재판부가 정 회장에게 실형을 선고할 경우 정 회장은 법정구속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2심 선고를 앞두고 경제계를 중심으로 정 회장이 수감되면 현대차가 심각한 경영상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재판장인 이재홍 부장판사가 "저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우리나라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도박을 하기가 꺼려졌다"고 집행유예 선고 이유를 밝힌 대목도 이런 우려를 감안한 것이다. 이 부장판사는 선고 말미에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약속한 사회공헌에 진력해 달라"며 '경제 살리기'를 주문하기도 했다.
정 회장이 계열사의 돈을 빼돌려 조성한 비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점, 적극적으로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점도 집행유예 선고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 부장판사는 양형 선고에 앞서 "일부에서는 경영진에게 중형이 선고된 미국 엔론 사태와 이 사건을 비교하더라"며 "그러나 엔론과 달리 정 회장은 조성된 비자금을 개인적 치부에 쓰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이 69세의 고령인 점도 법정 구속을 면한 배경으로 보인다. 특히 정 회장이 최근에 정부로부터 여수박람회 유치 명예위원장에 임명된 것이 선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이 부장판사는 "정 회장이 여수 세계박람회 명예위원장으로 위촉됐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심리적 압박을 많이 받았다"며 "유치에 노력해 달라"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이 정 회장에 대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항소심을 사실상의 법률심(사실 여부가 아닌 법률관계만 다루는 재판)으로 운영하겠다던 사법부의 공언과 배치되는 것이다.
대법원은 2월26일 사법사상 최초로 전국 5개 고법과 18개 지법의 형사항소심 재판장 23명이 참석한 항소심 재판장 회의를 열어, 2심에서 1심의 선고 형량을 감형해주는 온정주의 관행을 없애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른 재벌 비리 사건과의 형평성도 문제다.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은 비자금 조성 액수가 220여억원으로 현대차의 비자금 액수에 크게 못 미치고 정 회장과 마찬가지로 회사측의 피해를 모두 변제했는데도 1심에서 징역 4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도 이런 비판을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장판사는 "화이트칼라 범죄에 관대하고 재벌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런 지적을) 달게 받겠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정 회장에게 7년간 8,400억원의 사회공헌기금 출연을 강제하고 사회봉사명령을 내린 것은 이런 비판에 직면한 재판부가 고민 끝에 내놓은 절충안이라는 분석이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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