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총장과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물리학자 최규남 박사(1898~1992)를 21년 전에 인터뷰한 일이 있다. 입시철을 맞아 대학입시와 교육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89세의 건강하고 유쾌한 원로와의 인터뷰는 즐겁고 보람 있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공무원들에 대한 당부로 이런 말을 했다. "장관은 흐르는 물과 같고 여러분은 물 바닥에 깔린 차돌과 같은 존재입니다. 차돌이 부동의 자세로 안정되면 언제나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게 됩니다. 먼저 국가ㆍ사회를 생각하고 그 다음 다른 사람, 맨 마지막으로 나를 생각하십시오."
● '깜도 되지 않는' 유치함 꼴불견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장관은 본질적으로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는 사람이며, 공직사회가 맑으려면 바닥의 차돌과 모래는 물론 물 자체가 바르고 맑아야 한다. 그의 말이 새삼 떠오른 것은 요즘 고위 공직자들의 처신과 행태에 못 마땅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이 무얼 하는 자리인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영달과 명리를 좇아 행동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온다.
너무도 시시하고 유치해서, 그야말로 '깜도 안 되는' 모습이 두드러져 보인다. 코드라는 이름 아래 공직사회에서는 용렬한 모습만 확대 재생산 복제되고 있다.
김성호 전 법무장관이 물러나면서 많은 말을 했다. 그는 <목민심서> 를 인용해 "벼슬은 갈리게 마련이니 갈려도 놀라지 말고 잃어도 연연하지 말라.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는 게 옛사람의 의리"라고 말했다. 목민심서>
이어 <맹자> 를 빌려 "부귀도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 지조를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협과 무력도 그 뜻을 꺾지 못한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고 대장부의 모습을 되새겼다. 맹자>
그의 처신이 옛 말씀과 부합하느냐는 다른 문제이지만, 어쨌든 모두 맞는 말이다. 새가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 그 말이 선하다는데, 물러나는 사람의 말도 대개는 옳고 선하다.
이치범 전 환경부장관이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후보인 이해찬 전 총리의 캠프로 갔다. 이임사에서 "업무를 차분히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개인의 정치적 선택을 앞세워 후임 장관에게 과도한 부담을 안겨준 것이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문제는 참여정부의 마무리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대통령을 뽑는 게 이 시대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임 동기다. 20대에 학생운동, 30대에 사회운동, 40대에 환경운동을 했다는데, 그가 몸 담았던 환경운동연합마저 그의 선택을 환경운동가, 환경행정가로서의 이력과 배치된다고 비판했다.그의 캠프 행은 이렇게 공적 동기를 의심 받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 구출 007'을 하고 개선한 김만복 국정원장의 언동은 한 마디로 가볍고 자질구레하다. 많은 사람들과 언론의 지적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 대통령이 편들어 주니 별 일도 아니겠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는 것은 국정원장이 아니라 일반 기관장으로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 나쁜 경우는 벼슬을 향해, 벼슬을 위해, 벼슬 안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공직을 맡기 전에는 대통령을 비난하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아부를 하고,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으려고 하기는커녕 한 술 더 뜨며 기승을 부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있는지 없는지 그 자신도 몰랐을 소신을 바꾸어가며 충성경쟁을 벌인다. 비루한 모습이 안쓰럽다. 게다가 요즘은 모두가 싸움닭이 되어 열심히 싸운다. 그래야 뒤에서 지켜보는 대통령이 알아 주기 때문이다.
● 대통령의 눈치만 보지 말고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미 아무리 말해 보아도 소용이 없으므로 그 밑의 공직자들에게 호소한다. 공직의 무거움과 중요함을 생각해 그야말로 공공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판단하고 처신하기 바란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맡기 어려운 자리에 앉았으면 부끄럽지 않게 해야 옳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流水不爭先)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올바르고 자연스럽게, 정직하고 광명정대하게 일하도록 하라.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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