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해남 미황사의 새날은 벌써 시작됐다. 아침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신도들과 함께 벽안의 두 사내 올리버(29)와 스테파노(33)가 대웅전에 들어선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승복이 제법 태가 난다.
방석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은 두 사람은 불경을 곧잘 따라 읽으며 아침 예불을 마쳤다. 아침 공양(식사)은 나물죽과 양배추 무침, 무 절임, 나물이다.
식사하면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 그들의 식문화였을텐데 밥상 앞에 앉은 두 외국인은 묵묵히 수저만 놀린다. 사찰에서는 식사마저도 엄숙한 의식임을 두 외국인 청년은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올리버는 부산교육연수원에서 4년간 영어 강사일을 하다 고국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 뭔가 뜻깊은 기억을 만들기 위해 3박 4일 일정으로 미황사를 찾았다. 2년 전 이곳에서 템플스테이를 경험했다는 친구의 권유를 잊지 않았었다.
4년간 한국에서 지내며 서울 부산 경주 안동 남해 안면도 등 유명한 관광지는 거의 다 다녀봤다는 그는 “호텔에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즐기는 여행도 좋지만 정신적인 편안함을 느끼기에는 템플스테이가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물론 잠자리와 식사가 모두 해결되면서 하루에 3만원이라는 가격도 매력적이다.
템플스테이에 대한 칭찬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무용수인 스테파노도 한 목소리를 낸다. 부산에 공연을 하러 들렀다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고 찾아 온 그는 절 생활이 맘에 쏙 들어 이곳에 눌러앉은 지 벌써 2주째다.
그는 절이 좋은 이유로 웰빙을 이야기 했다. “속이 부담스러운 고기 대신 몸에 좋은 음식을 규칙적으로 먹는 것도 그렇고, 절제된 공간이어서 술과 담배를 못하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자극적이지 않은 절 음식이 재료 그대로의 맛을 최대한 살린 담백한 것들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점도 템플스테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푹신한 침대와 시원한 냉방시설은 없지만 이들의 얼굴엔 만족스러움이 가득하다.
템플스테이에도 종류는 여러가지다. 수련형 템플스테이는 참선, 묵언수행 등 지켜야 할 것이 많지만 미황사에서 경험하고 있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는 새벽 4시, 저녁 7시 하루 두 차례 예불과 공양 시간만 지키면 나머지 일정이 모두 자유라 주변 관광도 가능하다.
올리버는 “절 뒷산(달마산)에 올라갔었는데 앞으로 펼쳐진 들판과 바다가 그림 같았다. 올 여름 비가 많이 오고 더워서 그런지 수풀이 아주 풍성했다”고 말했다.
편안한 템플스테이가 준 여유인지 그들의 기억속 한국 사람에 대한 인상도 좋았다. 한국 방문이 처음인 스테파노는 한국인에 대해 “수줍음 많고 정직한 것 같다. 버스나 택시를 타도 요금을 속이지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다혈질이면서도 매우 친절하다”고 평했다.
미황사 주지인 금강 스님은 “외국의 사원이나 피라미드 같은 유적은 그냥 구경만 하는 곳인데 비해 한국의 사찰은 수백년에서 천년 이상된 역사적인 공간에서 먹고 자면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이라면 템플스테이만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템플스테이도 휴식형, 불가 체험을 위한 수련형 등 다양하게 나뉘어져 자신의 목적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바쁘게 살아왔던 삶의 긴장을 풀고 정신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어 템플스테이가 너무 좋다”는 그들에겐 다소 먼 화장실의 불편함도 “밤에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은 밤하늘과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또 다른 기회”로 기억될 뿐이다.
해남=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 템플스테이는? 예불·참선 등 체험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사찰의 일상과 수행자적 삶을 경험하는 문화체험 프로그램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숙박시설 확충을 위해 33개 사찰로 시작한 것이 2007년 현재 72개로 늘어나 전국 어디서나 템플스테이가 가능하다.
이용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수도 크게 늘었다. 첫 해인 2002년에는 1,259명이던 것이 2005년에는 6,617명, 2006년에는 9,497명으로 증가했다. 올해는 휴가철을 앞둔 6월까지 4,256명을 기록해 연말까지 1만명선을 무난히 돌파할 전망이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은 예불, 발우공양, 다도, 참선 등으로 이뤄진 1박2일이 ‘기본형’이다. 여기에 숙박을 뺀 반일형 ‘템플라이프’, 여러날 머물면서 불교에 대해 더 깊게 배우는 ‘수행형’이 있다. 가격은 1박에 3~6만원 선.
김상기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팀장은 “초기에는 수행 없이 사찰에서 며칠 쉬다 가는 외국인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불교문화에 관심이 높아져 3박4일 혹은 4박5일 수행형에도 눈을 돌리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 고택체험, 외국인이 더 좋아해
“한국을 ‘고요한 새벽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라고 이야기 한다지만 이곳만큼 평화롭게 고요한 분위기가 감도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경북 안동의 지례예술촌을 다녀간 ‘시애틀 타임스’ 기자가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한 종택을 인근으로 옮겨 89년 문을 연 지례예술촌은 일반인들이 하룻밤 머물며 다양한 유교문화를 체험하고 풍류한마당 등 전통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웃도 하나 없는 궁벽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외국인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례예술촌 김원길(65) 촌장은 “서울 등 대도시의 복잡함에 지쳐있다가 400년 된 고택체험을 해보고는 크게 만족해 한다”고 말했다. 옛 선비들의 풍류였던 고독을 즐기는 ‘한적미(閑寂美)’를 오히려 외국인이 더 잘 즐긴다는 게 김 촌장의 설명이다.
호주에서 왔던 한 손님은 “밤에 자리에 누워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감탄할 정도다.
김 촌장은 “경복궁이나 덕수궁 가서는 사진이나 찍지 한국의 전통 가옥에서 잠을 잔다거나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맛보고, 한복도 입어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며 “1년에 10번을 지내는 제사의 모든 과정을 손님들에게 공개하는데 외국인의 관심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지난해 지례예술촌을 찾은 외국인은 600명 정도. 올해는 800명 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제화되지 않은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은 외국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이를 테마로 한 관광상품의 만족도도 일반 상품보다 훨씬 높다.
투어재팬 윤기준 대표는 “안동 하회마을에 갔을 때 새벽에 손님을 택시에 태워 부용대에 올려 보낸 뒤 하회마을을 내려다 보게 한 후 물안개 낀 강을 쪽배로 건너게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고 소개했다.
그는 “관광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작업으로 똑같은 하회마을이라도 어떻게 새롭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시 풍남문 일대에 조성된 전주한옥마을도 외국인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민박 등 다양한 한옥숙박체험 공간이 있고 판소리 한지공예 다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한옥숙박체험을 하는 ‘아세헌’의 주인은 “몇 년 전 독일인이 방문한다고 해 아침식사로 한정식 외에 빵과 버터, 우유 등을 준비했지만 손님들은 양식은 거들떠 보지 않고 밥과 미역국, 나물 등 반찬을 깨끗이 비웠다”며 “너무 맵거나 특이한 냄새가 나지 않는 한 한국음식은 외국인에게 경쟁력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 전통문화 체험은 관광 연계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주시 문두현 관광진흥계장은 “판소리 공연을 감상한 외국인이 한복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다음날 한복가게에 들러 80만원을 내고 선뜻 사더라”며 “전통 체험을 통해 깊숙하게 전달된 한국의 이미지가 관광객의 구매욕구까지 유발시킨다”고 말했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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