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3년 가을 겨울 봄 세 계절을 나는 파리에서 보냈다. 줄곧 파리에만 머문 건 아니지만, 생활 근거지는 파리였다. 구체적으로, 파리 14구 주르당 거리의 학생기숙사 시테 위니베르시테르가 내 잠자리였다. 그때 나는, 앞서 여러번 들먹인 ‘유럽의 기자들(Journalistes en Europe)’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다.
■ 느닷없이 찾아온 기자연수 1년
‘유럽의 기자들’은 기자 연수 프로그램 이름이기도 하고, 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재단 이름이기도 하고,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기자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은 유럽연합 집행부와 그 회원국 정부, 기업체 따위의 후원을 받아, 여러 나라 출신 기자들에게 유럽 워처(watcher)로서의 첫 걸음을 걸린다.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는 대학과 연구소의 유럽 문제 전문가들이 이끄는 세미나고, 다른 하나는 잡지 <유럽(europ)> 의 편집이다. <유럽> 을 대여섯 호 내고 나면 한 기(期)가 끝난다. <유럽> 의 기삿거리를 찾아, 우리들 유럽의 기자들은 열흘에서 두 주 가량의 취재 여행을 되풀이했다. 유럽> 유럽> 유럽(europ)>
그 세 계절 동안, 북유럽을 제외하고는 유럽 대륙의 수도들 대부분을 밟아본 듯싶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모든 기자가 매호에 두세 꼭지의 기사를 프랑스어나 영어로 써야 했다. 편집도 팀을 나누어 돌아가며 했다. 그러니 우리는 세미나에 참가하는 학생이기도 했고, 펜기자와 사진기자와 편집기자를 겸한 잡지쟁이이기도 했다.
‘유럽의 기자들’은 일상의 권태에 절어있던 30대 중반 사내에게 어느 가을날 소리없이 찾아든 축복이었다. 시간의 미화작용에 기대어 뒷날 돌이켜보는 행복 말고 순간순간 겨워했던 행복이 내 삶에 있었다면, 그것은 파리에서의 그 세 계절이었다. 나는 그 뒤 파리에서 네 해 남짓을 더 살았지만, 그 가을 겨울 봄만큼의 행복감을 다시 느끼지 못했다.
파리가 점차 익숙해지면서 처음의 자극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파리는 서울 말고는 내가 살아본 유일한 도시고, 그래서 내가 어렴풋이나마 속살을 들여다 본 유일한 도시다. 이 도시의 기억 맨 밑바닥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이들은 토박이 파리지앵이 아니라 내 이방인 동료들이다. 그 해 ‘유럽의 기자들’ 참가자 가운데 프랑스인 기자는 하나뿐이었다.
■ 너나들이와 볼입맞춤 오가던 그 시절
30대 후반 프랑스에 살 땐 더러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들도 이젠 소식이 거의 끊겼다. 그래도 그 친구들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쿵쾅거린다.
예루살렘에서 온 미리암 S(이스라엘 정부를 미친 살인기계라 욕하면 이 유대인 여자는 선뜻 맞장구쳐 주었지), 시드니에서 온 헬렌 P(소설을 쓰고 싶다 했는데 꿈은 이뤘는지), 몬트리올에서 온 제프리 H(내게 빌린 100프랑을 끝내 갚지 않았다), 더블린에서 온 캐서린 M(그녀는 1981년 영국 감옥에서 단식투쟁 끝에 죽은 에이레공화군 지도자 보비 샌즈가 자유의 투사라 했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나는 그 둘이 결국 똑같은 말이라고 대꾸했고), 도쿄에서 온 시노부 T(아내가 김치를 담글 줄 알았다! 내 입엔 맞지 않았지만), 루사카에서 온 메리 N(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일본 천황가는 한국인이라 해 시노부와 내가 함께 빙긋거렸지), 말뫼에서 온 소피 R(스웨덴 어린이들이 모두 행복하진 않다는 증거가 자신의 어린 시절이랬다), 다카르에서 온 압둘라이 N(모두가 마시고 피울 때도 이 무슬림 친구는 꼿꼿이 금욕적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온 주잔나 R(내가 시노부에게보다 더 인종적 친밀감을 느꼈지), 바르샤바에서 온 로만 G(줄곧 잘 지내다 서먹서먹하게 헤어졌다), 소피아에서 온 페치아 K(그녀의 동포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떠올리게 했던 그 총명함!), 그 밖에 이런저런 정겨운(이따금은 얄미운) 얼굴들.
그 얼굴들 뒤로 한 공간이 떠오른다. 루브르 거리 33번지 언론인센터 건물 5층. 그곳이 우리들 ‘유럽의 기자들’ 보금자리였다. 담배연기가 늘 자욱했고 온갖 언어가 나풀거렸다. 물론 지배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그곳에선 너나들이가 규칙이었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든 상대를 ‘투아’(toiㆍ‘너’)라고 불렀다. 남자 동료들끼리를 제외하곤, 하루에도 몇번씩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볼 입맞춤(프랑스어로 ‘비주 bisou’)을 했다.
나는 처음 그게 서양사람들의 보편적 인사 방식이려니 여겼다. 그러나 유럽과 아메리카의 기독교 문명권에서 온 동료들 가운데도 그런 인사 방식을 어색해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물론 우리들 모두, 이내 비주로 만나고 비주로 헤어지는 데 익숙해졌다.
몇몇은 제 입술을 동료의 볼이 아니라 입술에 포개기도 했다. 그리고 농담과 친숙함을 버무려, 동료를 ‘디어(Dear)’나 ‘허니(Honey)’나 ‘스위티(Sweetie)’로, 또는 이에 상응하는 프랑스어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내 기억이 옳다면, 그런 입맞춤이나 도발적인 호칭에 ‘섹슈얼 임플리케이션’은 (거의) 없었다. 잠자리를 같이 한 친구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그랬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20대 말, 30대 전반의 남녀들이었고,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곳이 파리였으니 말이다. 한 미국인 유머리스트는 파리 사람들이 2,000년 동안 해온 건 사랑과 혁명뿐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 있다. 거기서 사랑이란 물론 박애가 아니라 섹스다), 유럽의 기자들은 단단한 우애집단 이상은 아니었다.
루브르 거리 33번지 5층은 밤새 불이 켜져 있을 때가 많았다. 게으름을 부리다 <유럽> 기사의 마감시각을 지키지 못한 동료들이, 연수 중에 소속사의 기사를 쓰거나 프리랜서 노릇을 해야 했던 동료들이, 이따금은 시내에서 너무 늦게까지 노닐다가 교외의 거처로 돌아갈 일이 막막했던 동료들이 무시로 거길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유럽>
제 거처에 컴퓨터를 따로 장만해 놓을 만큼 넉넉한 기자는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었으므로, 루브르 거리 33번지 바깥에선 일을 할 수 없었다. 재단에선 사무실 열쇠를 네 개 복사해 우리에게 건넸고, 우리는 필요에 따라 돌아가며 열쇠를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재단이 우리에게 보인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유럽의 기자들’ 사무처에는 좀도둑들이 탐낼 물건이 적지 않았고, 5층 사무처와 4층의 언론인센터 도서관은 문이 없이 계단으로 직접 연결돼 있었으니 말이다.
■ 금요일이면 밤샘 술판 그립기만…
루브르 거리 33번지 바깥에서도 우리는 몰려다니기 일쑤였다. 같은 거리의 카페 푸르미나 걸어서 5분쯤 걸리는 주르 거리의 아일랜드 맥줏집 제임스 조이스엘 밤 시간에 들르면, 우리들 중 몇몇이 반드시 거기 죽치고 있었다.
때론 센강 건너의 생미셸 거리로 진출해 밤새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밤샘 술자리의 더치페이를 시도 때도 없이 감당할 만큼 형편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몇몇은 재단에서 끌어다준 장학금만으로, 만만치 않은 파리 물가를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거처를 돌아가며 밤샘 술판을 벌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취재 여행이 잡혀있는 주 말고는 거의 예외없이, 금요일이면 세미나실 칠판에 ‘수아레(soireeㆍ 저녁 파티)’ 공고가 나붙었다. 우리들 중 누군가의 집에서 그날 저녁에 술판이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제가끔, ‘양심껏’, 제 몫의 술과 음식을 들고 동료의 집을 찾았다. 다들 양심에 너무 충실했는지, 늘 술과 음식이 남았다. 말이 ‘수아레’였을 뿐 술자리는 늘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는데도 말이다.
지하철이 다시 다니기 시작할 때까지, 우리는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고 뽀뽀했다. 웃음도 격렬했고, 울음도 격렬했다. 여자 동료들만이 아니라 남자 동료들도 울 때가 있었다. 어쩌면 명정(酩酊)이란 정신의 부패상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술자리들이 그립다. 언어의 서?이 결코 교감의 벽을 두르지 않았던 그 술자리들이.
■ 퐁데자르 다리가 긴 이별 현장으로
1993년 5월 마지막 일요일, 퐁데자르라는 센강 다리 한복판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춤추고 마시며, 밤늦도록, 우리는 코앞으로 다가온 이별의 서운함을 달랬다. 오가던 행인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 가운데 용기 있는 이 하나가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죠?” 코펜하겐에서 온 올라프 J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모든 나라 사람들이에요. 국제노숙자협회 회원들이죠.” “아, 그렇군요.” 용기를 발휘해 호기심을 채운 행인은 멋쩍은 웃음을 내보이고 총총 사라졌다.
며칠 뒤 서울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싱그러움이 내 몸뚱이에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싱그러움이.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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