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자영업을 하는 정모(39)씨는 올해 제주도로 가려던 여름 휴가를 포기했다. 대신 추석 연휴기간을 맞아 3박4일 동안 부인, 두 아들과 함께 중국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유는 비용 때문이었다.
제주 여행에 드는 기본 경비만 왕복항공료(18만5,800원)와 숙박료(펜션 1박 15만원), 렌터카(1일 8만원)를 포함해 145만원이 넘게 나왔다. 여기에 사설관광지를 둘러보고 식사비 등을 추가해 제대로 관광을 한다면 200만원을 들여도 모자랄 정도였다.
정씨는 여행사를 통해 “제주도 알뜰여행 상품이 없냐”고 문의했지만 오히려 “왜 비싼 돈 주고 제주도를 가려고 하느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여행사는 4성급 호텔을 이용하고 상하이 주변의 다양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1인 당 36만원대 중국 패키지상품을 권유했다.
정씨는 “이것 저것 따져보니 오히려 중국여행이 제주도보다 싸서 마음을 바꿨다”며 “국내 여행이 해외여행보다 비싼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제주는 한국관광의 모순을 그대로 옮겨놓은 축소판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외에는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 제주 관광은 그다지 매력적이 못하다.
특별히 볼만한 것도, 살만한 것도, 즐길만한 곳도 없는데 턱없이 비싸기만 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가느니 차라리 해외 여행을 가겠다”는 말은 제주관광의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관광객이 모처럼 찾아왔어도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인상을 갖고 떠나는 것이다.
지난달 초 제주에서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보낸 강모(35ㆍ여)씨는 제주관광에 대한 ‘품평’을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만을 쏟아냈다. “세상에 해수욕장에서 비치 파라솔 하나 빌리는데 3만원 하는 게 말이 됩니까.
다른 지역은 공짜로 빌려주는데…. 해송림 그늘 아래 있는 평상에 앉아 쉬려고 하면 어김없이 식당 주인들이 쫓아와 임대료 5만원을 내놓으라며 앉지도 못하게 하더라구요.”
렌터카의 내비게이션도 툭하면 ‘먹통’이 돼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그는 “도로번호가 지도와 다르고, 업그레이드 안된 내비게이션 때문에 30분 동안 같은 동네만 맴돌기도 했다”며 “차량반납 때 회사측에 항의했지만 ‘그게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보여 황당했다”고 말했다.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만한 관광상품이 많지 않다는 것도 제주 관광이 외면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여름 휴가 때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내 박물관과 테마파크 투어에 나섰던 라모(38)씨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박물관 천국’이라는 제주의 박물관 중 상당수가 이름값을 못할 정도로 빈약한 콘텐츠로 채워져 있는 데다 테마파크도 차별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 유명 건축물의 미니어처들을 전시해 놓은 ‘소인국 테마파크’와 ‘미니미니 랜드’는 이름만 다를 뿐 거의 판박이였다. 또 ‘제주러브랜드’ ‘건강과 성(性)박물관’ ‘세계성문화박물관’도 차별성이 없어 관광객을 겨냥, 장삿속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라씨는 “초콜릿 박물관의 경우 제작 기구 몇 개만 달랑 전시해 놓아 박물관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며 “특히 박물관 입구에 ‘큰 기대를 가지고 오시면 실망할 수 있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붙여 놓아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관광객의 재방문을 유발시킬 스포츠ㆍ레저 관광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여행의 묘미라 할 수 있는 쇼핑관광 환경도 열악하기 짝이 없다. 6월초 3박4일 일정의 제주도 가족여행을 다녀갔던 김모(48)씨의 쇼핑백은 가벼웠다.
제주공항 면세점에서 산 고급 양주 1명이 전부였다. 김씨는 “기념품점을 돌아다녀봤지만 값만 비싸지 살만한 물건은 거의 없었다”며 “공항 면세점에서도 제주를 상징하는 문화상품 등은 없고 외국산 고급 화장품과 시계 등만 넘쳐 나는 이유를 모르겠더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외국어 능력 부족도 국제제주관광 이미지를 흐리고 있다.
제주의 한 프리랜서 통역가이드 김모(37ㆍ여)씨는 “쇼핑에 나선 외국인들을 보면 언어불편 때문에 쇼핑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쇼핑관광은 지역경제 활성화와 직결되는 만큼 쇼핑 지출이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쇼핑업소 종사자에 대한 기초 외국어 회화 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제주노선의 항공수요 불균형도 제주관광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다. 제주관광객은 2005년 500만 명을 넘어선 이후 꾸준히 늘고 있지만 오히려 항공좌석 수는 줄어들고 있다.
실제 지난해 제주노선 항공기 운항편수(편도기준)는 3만5,229편으로 전년보다 1,024편이 늘었지만 좌석 수는 669만8,689석으로 전년보다 46만4,047석(6.5%)이나 줄었다.
이는 대형 항공사들이 운항수익이 적은 제주노선보다 비슷한 거리의 일본이나 동남아 등 ‘돈 되는’ 단거리 해외노선 운항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다 보니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제주여행을 포기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을 정도다. 도내 한 특급호텔 관계자는 “얼마 전에 150명이 넘는 단체 세미나 고객들이 투숙하기로 했었지만 항공권을 구하지 못해 행사와 함께 투숙을 취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제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 제주도 패키지, 2박 3일에 18만원???
‘제주도 18만5,000원.’
올해 여름 휴가철에 한 여행사가 제시한 2박3일짜리 1인 당 패키지 관광상품 가격이다. 이 가격은 왕복항공료와 호텔 숙박료, 교통비, 가이드 수수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어떻게 이처럼 왕복항공료(서울-제주 성수기 기준 18만5,800원)에도 못 미치는 상품이 가능할까.
여행업계의 한 관계자는 “항공사, 숙박업체와 고객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가격을 대폭 할인 받고 제주 현지 관광안내여행사에 투어피를 주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털어놓았다.
이른바 ‘노 투어피(No tour fee)’로 불리는 이 같은 가격 ‘후려치기’는 곧바로 현지 여행사의 몫으로 돌아간다. 식사비와 교통비 등 지상여행경비를 받지 못한 현지 여행사는 직접 경비를 부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비용절감을 위해 도깨비도로나 섭지코지 등 대부분 입장료가 없는 곳으로 관광여행 코스를 짜고, 무리한 옵션 관광을 요구하기 일쑤다.
이처럼 제주관광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덤핑상품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고객부터 유치하고 보자는 여행업계의 풍조가 1차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덤핑상품만 찾는 소비자들도 한 몫 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싼 맛’에 저가상품을 구입한 뒤 관광일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따로 노는’ 얌체 관광객들이 늘어 나면서 상품 ‘공급’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 현지 가이드 한모(45ㆍ여)씨는 “저가의 버스 투어 상품을 사놓고 렌터카를 이용해 따로 놀거나 온갖 트집을 잡아 여행비용까지 환불 받아가는 불량 고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업계에서는 불량 관광객들이 전체 제주관광객의 5%정도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들을 ‘관광객 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을 정도다.
관광소비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 일본(오키나와)과 대만이 노투어피와 덤핑상품 근절을 위해 패키지 여행상품에서 항공ㆍ숙박료를 제외한 가이드 비용과 식비 등 지상경비를 여행객이 직접 지불토록 하거나 최소비용을 의무화하도록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전무한 실정이다.
도 관계자는 “관광도 일종의 소비행위인데도 현행 관광진흥법에는 소비자 보호규정이 없어 관광업계의 노투어피와 과다수수료 등 부조리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며 “이로 인한 소비자들의 피해가 도를 넘었는데도 정부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안경호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