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에서 수업 중에 학생들과 했던 논쟁이 생각난다. 주제는 ‘디지털 이미지를 어느 쪽으로 발전시켜야 하느냐’는 것. 컴퓨터 그래픽(CG)은 두 개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는 아날로그 세계를 빼닮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디지털 고유의 특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길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게임은 이 두 가지 이미지를 적절히 섞어서 사용한다. 게임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되는 ‘시네마 컷’은 실물을 방불케 하는 포토리얼리즘을 지향하나, 일단 게임에 들어가면 그래픽이 추상적 다이어그램 수준으로 뚝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실시간으로 쌍방향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메모리와 프로세서를 다른 데에 쓸 여력이 없다. 반면 시네마 컷은 플레이어에게 일방적으로 제시된다. 때문에 모든 용량을 고스란히 포토리얼한 환영효과를 내는 데에 사용할 수가 있다.
시네마 컷만이 아니라 과연 게임의 모든 상황을 포토리얼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학생들은 메모리를 늘리고 처리속도를 높이는 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게임의 모든 상황을 포토리얼하게 처리한 제품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실물을 방불케 하는 환영효과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실물을 방불케 하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속도와 긴장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대립은 미학에도 있다. <디지털 가상> 의 저자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간극은 ‘기술적’ 성격의 것이어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디지털 모자이크> 의 저자 스티븐 홀츠먼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간극은 ‘원리적’ 성격의 것이어서 결코 극복될 수 없다고 본다. 디지털> 디지털>
플루서를 따르자면, 게임의 모든 상황을 포토리얼하게 처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며 미학적으로도 가치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CG 개발자들은 실사를 방불케 하는 환영효과를 추구하며, 대중들 역시 ‘얼마나 실사와 닮았는지’로 CG의 질을 평가하곤 한다.
반면 홀츠먼을 따르자면, 아무리 픽셀의 수를 늘려도 디지털로 아날로그 세계의 연속성을 덮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이미지의 리얼리즘을 지향하기보다는 차라리 게임의 내러티브와 쌍방향성을 강화하는 게 더 현명한 전략이 될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실재세계와 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시뮬레이션을 만들려면 ‘초당 85 프레임, 100만 X 100만 픽셀의 해상도, 픽셀 당 1,600만 칼라, 좌우 235도 및 상하 100도의 시각영역’이 필요하다. 이는 아직 기술적으로 요원한 일이다.
물론 대중은 CG를 현실이 아니라 사진과 비교한다. CG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영화의 리얼리즘이다. 적어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관객은 실사와 그래픽을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기술이 더 발전하면 그 구별이 아예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첫 눈에 실사와 CG를 구별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정작 두 이미지를 ‘구별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 무리없이 구별해 낸다고 한다. 게다가 대중의 눈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CG의 수준과 더불어 ‘사실성’에 대한 대중의 기대수준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결국 실사와 CG의 간극은 계속 남게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이 자칫 이른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의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즉 실물과 완전히 똑같지 않고 어설픈 이미지가 보는 이에게 외려 거부감 내지 혐오감을 주는 것이다.
중력엔진 등 물리법칙을 시뮬레이션하는 것만으로 CG의 리얼리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에 현실감을 주려면, 동시에 관객의 주관적 느낌을 고려해야 한다. 가령 사격장에서 실제로 보는 기관총 사격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속의 기관총 사격이 훨씬 더 리얼하게 느껴진다. 라이언>
한 마디로 ‘실감난다’는 것은 물리적 사실을 넘어 심리적 사실에 속한다. 실감을 내려면 현실을 그대로 베끼는 것을 넘어 현실을 약간 왜곡하고 과장해야 한다. 이는 포토리얼한 CGI를 만드는 것조차도 단순히 기술을 넘어 동시에 예술의 문제임을 의미한다.
한국의 어떤 영화가 CG에 100억을 사용했다고 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거기에 1,000억을 들이기도 한다. 일단 물량으로 경쟁이 안 된다. 1,000억 짜리 CGI에 익숙한 눈은 100억짜리에서 어떤 어설픔을 볼 것이고, 이는 자칫 ‘언캐니 밸리’와 비슷한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섬뜩한 계곡’에 빠지지 않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할리우드에 못지않은 育謎뼈?들여 실사와 CG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그 계곡을 피해서 우회를 하는 것, 즉 홀츠먼의 권고대로 아날로그를 흉내 내는 대신에 디지털 고유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CGI에 포토리얼리즘의 전략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CG의 리얼리즘도 여러 가지 방향을 취할 수 있다. 가령 슈도리얼(pseudoreal), 쉬르리얼(surreal), 하이퍼리얼(hyperreal), 네오리얼(neoreal) 등등. CG를 통한 리얼리즘에도 미학적 전략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미지에 리얼리즘만 있는 게 아니다. 회화의 이미저리에 인상주의, 추상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방향이 있듯이, 디지털로도 얼마든지 다양한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다. 영화와 CG의 결합을 오로지 실사로 착각되는 포토리얼리즘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기술의 한계는 예술로 우회해야 한다. CG의 기술적 물신주의에서 벗어나 스토리를 강화하고 연출을 섬세하게 하는 데에 에너지를 사용하는 길도 생각해볼 수 있다. 참고로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전문가 박재욱씨는 “CG는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보조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 '언캐니 밸리' 현상로봇이 사람을 너무 닮으면 되레 사람들에게 거부감 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즉 '섬뜩한 계곡'의 개념은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내놓은 이론에서 유래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로봇이 인간을 닮을수록 사람들은 거기에 호감을 느끼나, 그 닮음이 특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그 때부터는 외려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고 한다.
이 이론이 일본에서 나온 것은 아마도 일본 로보틱스의 연구방향과 관련이 있을 게다. 미국의 로보틱스가 기능형 로봇에 주력한다면, 일본의 로보틱스는 인간을 빼닮은 휴머노이드의 개발에 집착한다. 바로 그 때문에 언캐니 밸리의 문제가 일본에서 먼저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예 인간을 닮지 않거나, 완전히 닮은 존재에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을 어설프게 닮은 로봇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 금속으로 된 의수보다는 고무로 만든 의수가 더 거북하게 느껴진다. 인간을 정교하게 흉내낸 왁스 인형의 섬뜩함을 생각해 보라.
실제로 일본에서 만든 정교한 휴머노이드들은 우리에게 왠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가령 실제 아기처럼 어리광까지 부리는 로봇, 놀라울 정도로 젊은 여자를 닮은 도우미 로봇은 그냥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섬뜩하다.
언캐니 밸리는 로보틱스만이 아니라 3D 애니메이션에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것이 바로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 의 이미지. CG만으로 이루어진 영화나, 디지털 액터를 쓰는 영화들은 종종 이 섬뜩함의 계곡에 빠져 실패하곤 한다. 폴라>
인간은 왜 자신을 어설프게 닮은 형상에 섬뜩함을 느끼는가? 이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진화심리학적인 것으로, 인간은 자신을 닮았으나 뭔가 모자라는 존재가 자신들의 유전자 풀에 섞여 들어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물론 언캐니 밸리의 명제가 아무 근거도 없는 사이비 과학이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휴머노이드가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휴머노이드나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다. 뭔가를 어설프게 닮으려다 실패한 영화도 '언캐니'할 수 있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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