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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27> 발등의 불 된 '대만대사관 재산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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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27> 발등의 불 된 '대만대사관 재산문제'

입력
2007.09.0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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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대사관 재산문제를 제외하고는 수교협상은 거의 타결한 셈이었다. 대만재산문제는 한중수교 과정에서 의외로 큰 변수였다. 중국측은 우리가 먼저 이 문제를 꺼내줄 것을 바랐다.

“합법적인 주한 외국대사관의 재산처분에 대해 한국정부가 간여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전제한 나는 대만대사관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했다. 그 무렵 주한 대만대사관 재산문제를 둘러싸고 대만과 중국 그리고 한국 사이에 치열한 첩보전과 두뇌싸움이 물밑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대만은 외교부 부부장을 반장으로 대책반을 구성, 명동의 대사관과 화교학교 부지 등을 처분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쓰고 있었다. 우리 정부에는 ‘장제스(蔣介石)총통 추모회’에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도록 공식 협조를 요청하면서 물밑으로는 이 금싸라기 땅을 일본과 한국의 회사들을 상대로 한중수교 이전에 처분하려 서두르고 있었다. 대만은 S그룹 등 대기업은 물론 재력 있는 중견기업에도 접근했다.

1992년 5월 초 한중수교 교섭이 은밀히 시작되던 시기에 절묘하게 맞추어 총통 특사로 방한한 장옌시 대만총통비서장은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정부 요로를 찾아 심상치 않은 한중수교의 움직임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주한 대만대사관재산 처리에 협조해 줄 것을 집요하게 요청하였다.

우리도 이런 사정을 알고 철저히 대처하고 있었다. 5월 6일 이상옥 장관이 밀명을 내릴 때 수교협상에서 대만재산처리 문제가 중요한 사안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곧 가동된 대책반은 보안유지와 함께 한국 내 대만재산문제를 수교의 성패를 가름하는 주요한 문제라고 판단하고 치밀하게 대처해 나갔다.

나는 대만재산문제를 안기부의 H간부와 K차장을 통해 철저히 감시 관리하도록 부탁했는데 그 후 안기부장의 특명으로 전국의 대만재산 동향이 일일보고 될 정도로 중시됐다.

한영택 수석연구관이 중국측에 최근 대만의 재산처분 움직임을 사실대로 추가 설명한 뒤 나는 수교가 지연될수록 대만이 움직일 위험성은 커지며 소유권이 이전될 경우 한국정부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중국측도 대만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주재 대만대사관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재산’이며 중국재산이라는 근거로 청나라 시절 한국의 화교들이 돈을 모아 구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일본, 영국, 필리핀 등과 관계정상화를 할 때 대만대사관을 넘겨받은 선례가 많다고 말하고 한국측에서 방법을 모색, 수교 후 중국에 넘겨 줄 것을 요청했다.

대만재산이 처리되기 전에 수교가 이뤄지면 중국이 우려하는 이 문제는 국제법과 관례에 따라 깨끗하게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문제는 서울 명동의 3,000여평의 대사관과 2,000여평의 학교부지, 명동과 수표동의 약 900평의 상가부지 4필지, 그리고 연희동의 약 8,000평의 학교부지 6필지 등 도합 28필지 1만5,000여평의 대만재산은 당사자들의 계약과 대금 지불로 등기만 하면 1주일 후 소유권이 간단히 이전될 수 있어 우리 정부로서도 효과적으로 막을 길이 없었다.

대만재산 처분은 곧 언론보도가 될 것이고 이를 계기로 막강한 친대만 세력을 동원하여 대만을 저버리는 수교에 반대하는 로비와 여론몰이 시나리오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대만재산문제는 한중수교 교섭을 철저한 비밀회담으로 만든 한 요인이었으며 수교공동성명 1주일을 앞두고 대만에 사전통고를 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동시에 중국으로 하여금 한중수교 교섭을 서두르게 하는 한 요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1979년 미중(美中)수교 직전에 대만이 주미 대만대사관과 관저를 단돈 10달러에 대만 계통의 민간단체에 명의이전했고 중국은 그 보복으로 중국 내 미국정부재산을 동결하는 후유증을 남겼다. 사우디와 일본도 대만재산처리문제로 후유증이 있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측이 수교교섭을 주도해 나가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이날 회의를 끝내면서 중국측은 다음날(3일) 오후 우리에게 베이징의 명소 이화원(頤和園) 관광을 제의했다. 한국대표단을 위로하는 의미로 이화원에서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는 일정을 준비했으며 보안문제는 중국 측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단오절의 민속행사인 경정(競艇ㆍ용으로 장식된 배들의 경주)이 끝나는 오후 4시 반 이후 모든 입장객을 다 내보내고 우리 대표단만 이화원을 관람시키려는 특별배려였다.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때까지 우리 대표단은 중국을 두 번 몰래 드나들면서 사진은 고사하고 기념품이나 문방구 하나도 안 갖고 귀국하는 등 보안에 극도로 조심하던 때였다. 우리 대표단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한중문화청소銖鰕?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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