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들이 성공 비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신의 습관으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을 꼽았다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발표(?)가 화제다.
박근혜 신정아 이영애 등을 누르고 이틀간 인터넷 검색순위 1위에 올랐던 이 중국의 옛 속담은 '입술(脣)이 없어지면(亡) 이(齒)가 춥다(寒)'는 의미다.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관계를 중시한다'고 의역한 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나 와신상담(臥薪嘗膽) 등과 대비시켰으니 CEO들의 낙점을 받기에 충분했다. 연구소의 홍보적 재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 말의 실상을 조금 곁들이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제3국이 우호관계인 두 나라를 각개 격파하는 과정에서 "옛 속담에…"라며 이 말을 인용한 기록(춘추좌씨전)이 있다.
잇몸이 외부의 찬 바람을 피하기 위해 입술을 꼬드기는 행태를 점잖게 표현한 이 말은 이이제이(以夷制夷)와 함께 예나 지금이나 중국 외교정책의 양대 축이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에서 중국은 조선이나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이라는 찬바람과 맞닥뜨리는 게 걱정돼 출병했음을 알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선 북한을 '입술'로 여기는 동시에, 한국으로 미국을 견제하는 '이이제이'까지 병용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권을 통해 그 말에 익숙해 있다. 참여정부 초기 민주당과 청와대 386참모진 사이에 갈등이 심각해지자 정대철 대표가 순망치한을 거론했다. "민주당이 있으니 대통령이 공격을 덜 받는 줄 왜 모르는가"라고 말했지만 청와대가 민주당을 엄호는커녕 핍박만 하는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지금의 민주당과 DJ의 후광을 업은 호남지역 간에도 그러하니, 상대가 입술이 되어 잇몸을 위해 찬 바람(열린우리당의 공세)을 막아주길 희망했다. 한나라당 경선에서는 이명박 박근혜 양 진영이 각자 이 말을 인용하며 스스로 '잇몸'임을 당연시 했다.
■입술과 잇몸은 공존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서로가 공생을 명분으로 상대방에게 입술 역할을 떠넘기는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 춘추전국시대 이후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었던 쌍방이 시너지효과를 발휘해 끝까지 함께 성공한 경우가 별로 없는 듯하다.
성공한 CEO들이 이 말에 감명 받는 것은 '인연'과 '관계'가 전제되는 동지적 의미에 집착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기적 심보로 자신을 대신해 찬 바람을 맞아줄 입술만 찾는다면 춘추좌씨전의 그것처럼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입술이 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순망치한을 들먹이지 말라.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