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손에 닿을 듯 했다. 예고편엔 가장 확실한 단골 주연이었지만 막상 막이 오르면 들러리였다. 자산규모 세계2위 은행인 영국계 HSBC의 국내은행 인수전에 얽힌 얘기다.
#2004년 12월 24일. HSBC의 제일은행 인수 실무 팀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홀가분하게 영국으로 돌아갔다. 가격(32억달러ㆍ약 3조원)도 충분히 제시했다.
막판에 껄끄러운 상대 SCB(스탠다드차타드)가 끼어들긴 했지만 98년 제일은행 인수 실패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수년간 공을 들인 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불과 보름 뒤 제일은행의 안방은 SCB가 차지했다. 겨우 700억원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불현듯 99년의 악몽이 떠올랐다.
#1999년 2월 23일. 서울은행이 HSBC에 팔렸다는 발표가 있었다. 정확히는 양해각서(MOU) 체결 발표였지만 모두 HSBC의 서울은행 인수로 받아들였다. 세계 일류로 꼽히는 HSBC의 국내 진출에 대한 온갖 전망과 분석이 쏟아졌다.
그러나 6개월 넘게 끌던 협상은 한국 정부와 HSBC의 입장차로 결국 무산됐다. 한국 정부는"엄격한 국제기준을 들이대는 보수적인 영국은행"이라고 했고, HSBC는 "한국의 은행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항의했다.
그런데 국내은행 인수 전에 무려 10년 동안 참가해 3전 전패(98년 제일, 99년 서울, 2005 제일)를 기록한 HSBC의 최근 행보가 심상치 않다. 한국에 남은 마지막 매물 외환은행 인수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국내은행 인수'4수'에 도전하는 HSBC가 과연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외환은행을 인수하겠다는 의지만큼은 강력하다. 영국 일간지 <선데이타임스> 는 27일 "HSBC가 55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은행의 지배 지분(51.02%)을 인수하기 위해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에 대한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았지만 조건부 계약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선데이타임스>
올해 한국의 인수합병(M&A)시장에 나온 최대 금융회사를 어떻게 하든 인수하려는 HSBC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돌아가는 판세도 HSBC에 유리하다. 론스타 역시 최근 존 그레이컨 회장이 직접 나서 HSBC와 단독협상 중이라고 밝혀 HSBC측에 힘을 실어줬다.
매각액수(50억~55억 달러)가 외신을 통해 언급되고 4주 정도면 구체적인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HSBC는 심지어 본 계약 체결 시점에나 밝힐 수 있는 외환은행 명칭과 상장 유지, 고용 보호 등까지 미리 공개했다.
그러나 의지와 분위기만으로는 2% 부족하다. 세 차례나 고배를 마실 때도 의지와 분위기는 늘 HSBC 편이었다. 초반에 기세를 올리다 가격문제나 입장차이로 막판에 꼬리를 내리는 '용두사미'(龍頭蛇尾) 형국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HSBC에겐 이번이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한국 내 영업을 지점형태(현재 11곳)에서 벗어나 확장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선 "HSBC가 가격까지 언급하는 걸 봐선 배수의 진을 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결전의 태세는 갖췄지만 풀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많다. 금융감독 당국이 2003년 외환은행 매각 의혹에 대한 법원의 판결 이후 외환은행 재매각 관련 사안을 심의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외국자본에 대한 정서적 거부도 똬리를 틀고 있다. 국민은행과 하나금융, 농협 등 외환은행을 차지하기 위해 일찍부터 날을 벼린 국내은행의 움직임도 주시해야 한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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