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한국형 IB를 키우자’ 시리즈를 마치면서 전문가 좌담을 마련, 바람직한 한국형 투자은행(IB)모델 육성방안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을 나눴다. 좌담에는 정부 쪽에서 금융감독위원회 김주현 감독정책2국장, 업계에서 한국투자증권 유상호 사장, 학계에서는 한양대 이상빈 경영학과 교수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경쟁력 있는 IB의 출현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든든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회=이성철 경제산업부 차장
사회=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IB탄생에 대한 기대감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왜 IB가 필요한지부터 얘기해보죠.
김주현=우리나라 경제구조의 변화에서 그 필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제구조가 복잡해지면서 기업들은 은행대출 외에 다양한 형태의 자금조달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요. 그 역할을 해주는 곳이 바로 IB입니다. 아울러 금융산업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 산업으로 경제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습니다.
IB가 금융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기폭제가 돼야 한다는 얘기지요. IB를 통해 자본시장이 발전하면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효과도 생길 것으로 봅니다.
이상빈=지금까지 금융회사의 역할이 단순 자금 중개였다면, 앞으로는 위험중개에 나서야 합니다. 다시 말해 위험거래(Risk-Trading)를 중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기업의 환율변동위험 같은 실물부문의 다양한 위험을 중개하고 회피(헷지)해주는 금융회사가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위험거래 중개에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데, 이것은 은행도 증권사도 아닌 IB만이 할 수 있습니다.
유상호=일각에서는 ‘왜 외국계 IB는 안되나, 꼭 토종IB를 육성해야 되나’는 지적도 합니다. 물론 선진 외국계 IB들이 자본시장의 공급자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의 주된 고객 기반이 자국의 투자자들이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들은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할 때도 한국기업 입장이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 편에서 가격을 산정하는 것이지요. 외국계 IB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받는 국내 중소기업을 위해서라도 토종IB의 육성이 절실합니다.
사회=어차피 토종IB를 육성하더라도 누군가는 벤치마킹해야 할텐데, 우리가 추구하는 IB모델은 어떤 것일까요.
유상호=특정 외국계 IB를 한국형 IB의 모델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업부문별로 역할모델은 있을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자기자본투자(PI)의 경우 골드만삭스가, 프로젝트파이낸싱(PF)는 맥쿼리가 가장 강점이 있습니다.
김주현=시장의 수요가 중요합니다. 우선은 시장수요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업무부터 시작해, 점차 업무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우리나라는 증권사들이 위탁매매(브로커리지) 영업에서 시작해 점차 개인자산관리쪽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 이 점에서 보면 자산관리에 비교우위가 있는 ‘메릴린치형 IB모델’이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메릴린치의 경우 소매금융에서 출발해 네크워크를 구축한 뒤 자문, 리서치, 자산관리 등으로 영역을 넓혀왔거든요.
유상호=쉽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무형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지급하는 데 강한 거부감이 있어요. 예를 들어, 기업공개(IPO)를 해줄 때 미국은 7~8%의 수수료를 받지만 우리는 3%도 받기 힘들지요. 그나마 수수료를 덤핑하는 금융회사까지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수수료(fee) 비즈니스는 어렵다고 봅니다.
이상빈=우리 경제에 왜 IB가 필요한가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싶습니다. 현재 한국경제의 가장 큰 당면 과제는 ‘10년 뒤 무엇으로 먹고 사느냐’입니다.
결국 10년 뒤 먹고 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필수적일텐데, 이 때 인수ㆍ합병(M&A)등 구조조정을 금융이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서 IB가 필요한 것이지요. 또하나,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노령화 사회가 진전되고 있지요. 이 점에서 노후보장을 위한 신상품 개발이나 자산관리 등에도 IB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사회=외국IB들이 국내시장에서 엄청?수익을 올렸듯이, 장차 우리 IB들도 적극적으로 해외 비즈니스를 해야겠지요.
유상호=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IB는 많지 않습니다.
일본 노무라증권도 처음에 글로벌 IB를 지향하다가 결국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처음부터 무리한 욕심을 낼 것이 아니라 한국에 기반을 둔 IB가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우리 경험이 경쟁력이 될 수 있는 신흥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을 택해야 합니다.
신흥시장이라면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의 IB보다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글로벌 IB가 위험성 때문에 진입하지 않는 시장을 선점한다면, 우리도 경쟁해 볼 만 합니다.
이상빈=같은 생각입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문화적 측면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금융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준법정신(Compliance), 리스크 관리, 그리고 무형재인 정보의 가치인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세가지가 문화적으로 뒷받침돼야 하는데, 우리는 규정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느냐부터 고민하고, 위험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또 지식이나 정보는 항상 공짜라고 생각하지요. 문화적 측면에서 이 세가지를 타파하지 않으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습니다.
유상호=그렇습니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IB에 실패한 것은 돈(자본)만 있었기 때문이지요. IB를 위한 문화나 인프라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회=제대로 된 IB가 육성되려면 무엇보다 적극적인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이상빈=금융산업에 있어서 규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합니다. 금융산업의 건전성 규제는 강화하되, 신상품 개발 등 영업행위에 대한 규제는 대폭 푸는 방식으로 규제정책을 끌고가야 할 겁니다.
김주현=이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제는 쉽지 않습니다. 1998년 미국의 대형 헤지펀드였던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가 러시아 채권투자 실패로 파산위기에 몰렸을 때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개입해서 자금을 지원하고 나섰지요.
감독규제를 받지 않는 헤지펀드에 중앙은행이 자금을 대준 것은 과도한 개입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파장이 헤지펀드 파산에 그치지 않고 금융시장전반에 확산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앙은행의 대처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상황에 따라 규제의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책 결정 당시 합리적으로 판단했다면,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사회=한국형 IB육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제도적, 시스템적인 선결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상호=제대로 된 IB육성을 위해서는 돈과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국내 금융회사의 자본력으로는 글로벌IB와 맞서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지요.
최근 베트남 출장을 다녀왔는데, 현지의 중소형 자산운용사가 역량있는 교포를 거액에 스카우트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베트남도 인력채용에서 글로벌 마인드를 갖추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좁은 국내 인력 시장을 두고 금융회사끼리 쟁탈전만 벌이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우리 교포 중 유능한 인재가 적지 않거든요. 회사 덩치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 인재를 적극 영입하려는 노력을 지금보다 몇 배 더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김주현=정부도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장이 자생적으로 경쟁력있는 IB를 육성할 수 있도록 장애요인을 제거하는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유상호=업계 차원에서 정부에 한 가지 건의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한국물 채권을 발행할 때 투자자들은 당연히 외국IB에게 주간사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계약만이라도 공정거래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내회사에 참여기회를 준다면, 이를 발판으로 국내 금융회사들이 역량을 키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미약하나마 국내IB를 육성할 수 있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이영태기자 ytlee@hk.co.kr사진=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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