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유일한 협상카드이자 바게이닝 칩(bargaining chip)이기도 한 대만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전에 우리가 제기해야 할 사항은 모두 밝히고 넘어가야 했다. 모두 6가지였다.
첫째 중국측이 ‘하나의 중국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방향을 거론하면 한국은 대만과의 역사적 특수성에 비추어 최대한의 비공식관계 유지를 주장하는 것, 둘째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중국의 지지, 셋째 북한 일변도 정책 지양과 남북한관계의 대등한 발전 즉 북한 수준으로 한중관계를 조속히 끌어 올리는 방안으로 항공ㆍ해운ㆍ어업ㆍ이중과세방지 등 각종 협정의 조기 체결, 넷째 북한의 비핵화 문제, 다섯째 중국의 한국전 참전에 대한 해명과 ‘중조(中朝)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 등 중국과 북한 혈맹관계의 청산과 북한의 대남무력도발 방지를 위한 중국의 공격용 무기 공급중단, 여섯째 조속한 시일 내 한중 정상회담 개최였다.
우리가 강조한 6가지 문제를 중국이 수용하고 우리는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상회담 방식을 통한 한중수교 타결을 바랐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하고 대만은 중국의 한 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인지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나는 이어 중국이 대만문제에 관한 최소한의 방향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최대한 수용하되 대만과는 최상의 비공식관계를 가질 것이며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나면 그 이후는 우리에게 맡겨달라고 부연했다. 이로써 약 30분간에 걸친 내 말을 끝맺었다.
우리의 요구사항 6가지를 구체적으로 내놓으면서 중국의 유일한 제기사항으로 이미 확인해 놓은 대만문제에 관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는 우리의 방식(Formulae)을 제시한 것이다.
대표단이 받은 훈령은 ‘전제조건 없는 수교 달성’이고 수교문제가 타결될 수 있도록 주요 사안에 대한 실무적 정지작업을 가급적 완료하는 것이기 때문에 6가지 사항을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주요 관심사항을 가능한 한 최대수준으로 제시’하라는 훈령에 따른 것이었다.
아울러 과거 양국의 일방적 관계를 의식했다. 이러한 역사는 이미 끝이 났다. 이제 새로운 한중관계를 백지상태에서 정립하여 나가는 역사적인 수교의 문턱에 와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표단은 완전히 대등한 관계에서 당당하고 의연히 중국과 새로운 역사를 출범시키려 하고 있었다.
새 역사의 ‘첫 단추’부터 올바르게 제대로 끼우자 - 이는 5월6일 내가 이상옥 장관으로부터 수교교섭 사명을 처음 부여받고 김석우 국장, 신정승 과장과 만나 함께 다진 결의다. 나는 모든 담력과 힘을 다해 문제점을 하나도 유보하지 않고 전력투구하는 자세로 우리가 거론해야 할 모든 문제를 의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밝혔다.
나의 발언에 회담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이 순간이 수교협상 과정에서 내가 가장 긴장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장루이지에(張瑞杰) 대사가 침묵을 깼다. “휴회합시다.”
우리 대표단의 표정을 살펴보니 긴장이 지나쳐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오히려 여유를 보이며 이 문제들은 우리 대표단이 수교에 앞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사명과 운명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위무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 대표단만 점심을 함께 했다. 긴장을 억지로 감추고 되도록 가벼운 농담과 화제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오후 회의에서 중국측 반응이 과연 어떨지 모두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오후 3시, 회의가 속개되었다. 장루이지에 대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제망휴령(提網携領)’이라는 사자성어를 끄집어냈다. 나는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장 대사가 바로 옆 자리에 벗어놓았던 양복 상의의 소매를 잡고 균형이 흐트러진 양복을 거칠게 흔들며 고조된 억양으로 말문을 열었다. 오전 회의에서 거론한 나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었다.
영(領)은 상의의 가장 중심이 되는 윗부분의 가운데로 사물의 가장 핵심부분을 의미한다. 강(綱)은 중추적 원칙을 말한다. 중국측이 생각하는 수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대만인데 중국측이 볼 때 한국측이 주변적인 문제, 즉 수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문제들을 붙잡고 늘어지면 핵심 문제인 ‘수교’가 해결되겠느냐는 시위인 것이었다.
중국은 이 핵심사안을 해결하지 않고는 수교의 어떤 다른 문제도 협상할 생각이 없으며 이는 중국이 수교한 모든 나라에 한 번도 예외 없이 적용해 온 원칙인데 한국측이 이를 어기고 있다고 거칠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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