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에서 유래했지만 이제는 일반인들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용어가 있다. TPO. 아무리 고급 청바지라도 격식을 갖춰야 하는 회의장에서는 결례가 되듯 때(Time)와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따라 옷차림을 적절히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비단 옷차림이 아니더라도 TPO는 처신의 엄중함을 말해주는 중요한 척도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화요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오세훈시장 초청 패션경영 조찬세미나'는 좋은 뜻에서 마련됐으되, 좀 더 섬세한 TPO정신이 아쉬운 자리였다.
오전 7시30분 일찌감치 세미나장을 꽉 채운 175명의 참석자들은 전원 패션업계 CEO와 패션디자이너, 패션 유관단체 임직원, 패션학계 인사들이었다. 오 시장은 취임 초기 밀라노와 파리 등 패션 선진도시들을 잇따라 방문하고 서울컬렉션을 세계 5대 컬렉션으로 끌어올리도록 지원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역대 어느 서울시장보다 패션을 '이해'하는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오 시장이 패션인들과 직접 소통하는 자리를 갖는다는데 대한 관심과 기대가 꽤 이른 시간에도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음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강연은 실망스러웠다. 오 시장은 한국패션산업에 대한 비전을 말하는 대신 취임 초 이미 발표한 시정 운영계획을 재탕하는데 1시간 남짓한 강연시간을 보냈다. 패션산업에 대한 언급은 '디자인 서울' 계획에 들러리 형식으로 붙은 10여분 정도였다. 대신 한강에 수륙양용버스를 띄우고 공해를 줄이기 위해 천연가스 충전소를 세우고,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월드디자인센터를 세우는데 반대가 심하니 세미나 참석자들이 좋은 방향으로 나서 달라고 주문했다. 패션 세미나가 아니라 시정홍보 자리였다.
강연회에 참석한 한 패션업계 대표는 "서울시가 시민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구나 싶긴 하지만 패션 세미나 성격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중견 디자이너는 "패션 현안을 갖고 강연했으면 더 유익했을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강연에 대한 불만이 잇따르자 며칠 뒤 서울시측은 "주최측이 '창의 시정에 대한 강연을 해 달라'고 해서 주제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일 뿐"이라며 "패션산업 육성책을 논하는 자리였다면 그렇게 했겠느냐"고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세미나를 주최한 한국패션협회에 기본적인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현재 국내 패션산업은 고가 시장은 해외 브랜드에, 중저가 시장은 중국산 카피제품에 점령당해 설 자리가 없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패션ㆍ디자인이야말로 10년, 20년 뒤 서울을 먹여 살릴 신성장동력산업"이라고 주장하는 오 시장의 비전에 패션계가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강연장을 가득 메운 그들의 조바심과 열망을 조금만 더 깊이 헤아렸다면 얼마나 근사한 상호교감의 자리가 됐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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